[유재형의 하이빔 35] 그놈의 자동차 이름 지어주기
후배 지점장과 오랜만에 만나 막걸리잔을 기울이면서 자동차 이름 짓느라 고생했던 이야기를 나누다 요즘 후배들은 차명 짓기가 쉬워서 좋겠다고 푸념을 털어놓았다. 영어 한두 글자 뒤에 숫자 몇 개 붙여주면 차명이 주르르 나오니 차명 자판기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백과사전을 펼쳐놓고 온 세상의 좋다는 이름은 다 골라내고 또 그렇게 골라낸 좋은 이름을 어느 놈이 먼저 등록해놓고 있지는 않은지 노심초사하던 시절에 비하면 요즘 차명 짓기는 얼마나 쉬운가. 물론 현역에서 고생하는 후배들이 들으면 무식한 소리 하지 말라고 탓하겠지만 말이다.
자동차의 차명을 짓는 방법은 통상 3가지 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세상에 존재하는 명사, 대명사, 형용사, 지명 등을 사용하는 것이다.
‘쏘나타’ ‘그랜저’ ‘싼타페’ ‘투싼’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특히 동네 이름(지명)은 나중에 사용하려고 미리 등록해둘 수 없기 때문에 같은 업종만 아니면 상표등록이 가능해 예전부터도 많이 이용해온 방식이다. 싼타페의 차명을 HMA(Hyundai Motor America)에서 지어준 이후로 SUV 이름은 거의 북미에서 지어주니 상품팀은 일이 많이 줄었겠다. (미국의 SUV, 픽업 이름은 온통 산, 강등의 유명한 지명이지 않은가!)
둘째, 두 개 이상의 단어를 조합해 사용하는 것이다.
‘Near(~에 가까운)’와 ‘Zero(0)’를 조합해 친환경차의 이미지를 부각시킨 기아 ‘니로(Niro)’를 들 수 있다. 쌍용의 코란도(KORANDO)가 ‘코뿔소’나 ‘특공대’ 이름이 아니고 “KOREAN CAN DO! (한국인은 할 수 있다!)”라는 말을 줄여서 만들었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들어 봤을 듯.
셋째, 알파뉴메릭(영+숫자)을 활용하는 방법이다.
알파뉴메릭(alphanemeric, alphabetic nemeric), 즉 영숫자(英數字)는 라틴문자와 아라비아 숫자의 합성어를 말한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의 자동차 브랜드들이 많이 쓰는 방식으로 벤츠의 S500, E350, E300, BMW의 320i, 530i, X3, X5, X6, 아우디의 A6, Q7, Q8, 시트로엥의 C3, C4, 그리고 C8 등(이차는 우리나라에 들어오려면 이름 바꿔야겠다.)을 들 수 있다.
G**로 이뤄지는 알파뉴메릭 이름을 사용하는 제네시스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G70, G90, GV80, GV70, GV60….)
상품팀에서 신차를 기획하여 최종적으로 신상품이 나오게 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지만 최종적으로 신제품을 세상에 내놓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게 이름과 가격이다.
원가자료 취합등이 완료되는 출시 몇 달 전에야 가격을 정하는 작업이 시작되지만, 차명은 더 일찍 결정해야 한다. 하나의 부품이라 할 수 있는 엠블럼, 책자, 홍보물, 심지어는 국내외 영업점과 정비센터 등 현대차와 연관 있는 모든 곳의 요소요소에 적용돼야 하기 때문이다. 미리 이름을 결정해야 각 부분이 이를 반영해 준비하게 된다.
판매가격은 원가 부문과 끝없는 협의를 통해 의견 차이를 좁혀나가는 과정을 거치고 때로는 발매일 직전에도 합의가 되지 않아 결국은 가격표에 ‘○○○ 만원~ ○○○ 만원’ 하는 식으로 가격범위를 표기하는, 못 할 짓을 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결정은 될 것이고 예정대로 런칭을 하게 된다.
하지만 차명이 늦게 결정면 예정된 발매 일정을 준수할 수 없게 되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할 수도 있게 된다. 국내외의 의견을 통합해 최고경영층에 보고했는데도 제때 결정이 나지 않는 경우다.
경영층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바로 대안을 제시하기 어려운 게 신차 이름이다. 각국의 소비자 선호도, 등록 문제, 문화적 문제 등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2차, 3차 예비안을 마련하지만 모두 최고경영층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렇다고 정몽구 회장에게 오늘 차명 결정 해주지 않으면 엠블럼 개발 등 일정을 맞출 수 없어서 신차 발매 일정이 늦어지니 “어서 사인하시오!”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심지어는 가뜩이나 일정이 빠듯한 상황인데 최고경영층에서 발매 일정을 더 당기라는 지시를 하는 바람에 회사가 발칵 뒤집힌 적도 있었지만 빨리 결정 안 해주면 죽네 사네 하던 각 부문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정을 맞춰나가는 것을 보니 역시 사람이 못 할 일은 없는 것 같다. 아니면 모두 엄살이었나?
현대차에서 일본 미쓰비시의 2세대 샤리오 모델을 라이센스 생산해 1995년부터 2002년까지 판매한 7인승 MPV인 싼타모(SANTAMO)는 그 차명이 코란도(KORANDO)처럼 영어 스펠링 ‘Safety And Talented Model’을 줄여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데 맞는 말인가? 실은 이미 정해진 차명을 심사숙고해 나온 것처럼 홍보에 활용하기 위해 마케팅에서 자주 사용하는 방법일 뿐이다.
현대차(그 당시는 현대정공)는 1995년 싼타모를 내놓기 전에 차명을 짓기 위해 고액의 포상금을 걸고 사내공모를 했다. 싼타모라는 이름을 응모한 직원의 차명이 1등으로 결정되어 실제 차명이 되었고 고액의 포상금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차명을 만든 사람은 그 직원의 담당 중역이었고 그 중역 대신 직원의 이름으로 응모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 들었다. 그 중역은 포상금 일부를 직원에게 주었는데 응모자가 직원이어서 세금도 그 직원 급여에서 몽땅 빠져서 나갔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유재형 <자동차 칼럼니스트>
필자 유재형은 1985년 현대자동차에 입사, 중대형 승용차 상품기획을 맡았으며 현대모비스 전신인 현대정공에서 갤로퍼, 싼타모 등의 개발에 참여했다. 이후 현대자동차로 옮겨 싼타페, 투싼 등 SUV 상품개발과 마케팅을 거쳐 현대자동차 국내상품팀장을 끝으로 퇴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