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선한 와중에 등장한 중형 세단. 돌아보면 이 집은 늘 어수선하지 않았나 싶다. 한국지엠 쉐보레 말리부다.
2.0 가솔린 엔진과 1.6 디젤, 그리고 1.3 E 터보 엔진으로 심장을 고를 수 있다. 2.0 가솔린 엔진 모델을 타고 인제 스피디움까지 달려가서, 1.6 디젤과 1.3 E 터보 모델을 서킷에서 잠깐 맛봤다.
넓은 공간은 말리부의 자랑이다. 비어있는 공간 그 자체가 주는 여유, 고급스러움이 있다. 말리부에는 그런 여유가 있다. 특히 다리를 꼬고 앉아도 남는 공간은 윗급의 차들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다. 그 고급지게 넓은 공간에 앞 좌석 무릎 에어백을 포함해 모두 10개의 에어백이 배치됐다.
37개의 센서, 카메라로 무장한 지능형 능동안전 시스템은 360도를 실시간 모니터하며 돌발상황에 대비할 뿐 아니라, 반자율 운전까지 가능하게 해준다. 차로 유지보조 시스템이 훨씬 안정적으로 작동한다. 도로를 정확하게 읽고 반응했다. 아주 잠깐 한눈파는 정도는 허락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운전은 운전자가 책임져야 한다. 아직까지는….
놀라운 정숙성은 여전하다. 대형 트럭이 바로 옆에서 달리는데에도 실내에서는 이렇다 할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다. 아주 빠른 속도를 내기 전까지는 바람소리도 들리는 듯 마는 듯 신경 쓰이지 않는다.
가솔린 2.0 터보 엔진은 6단 변속기의 조율을 거쳐 253마력의 힘을 낸다. 거침없는 힘은 도로 위에서 탄력 있게 차체를 끌고 나간다. 중저속에서는 무척 편안했고, 고속에서는 거침없는 가속이 압권이었다.
2.7회전 하는 스티어링 휠은 정지 상태에서도 저항감 없이 돌아간다. 힘을 쓰지 않아도 편하게 작동할 수 있다. 여성들이 좋아할 부분.
제법 탄력 있게 터지는 힘은 차체를 고속으로 거침없이 끌고 간다. 잘 달리지만, 고속에서 느낌은 조금 가벼운 편. 차의 무게로 지그시 누르며 달리는 중후한 달리기보다는, 가볍고 경쾌한 움직임으로 빠르게 달리는 느낌이다.
맥퍼슨 스트럿과 멀티 링크 서스펜션의 조합은 무난하다. 강하게 코너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지만, 도로 위에서 만나는 과속방지턱, 도로의 굴국, 구덩이 등을 지날 때는 충격을 잘 걸러준다. 노면 충격에 지지 않고 차체의 안정을 최대한 유지하는 것. 같은 서스펜션을 가진 1.6 디젤과 1.3 터보는 서킷에서 강하게 코너링을 구사하면 힘들어했다.
245/40R 19 사이즈의 컨티넨탈 타이어는 인재의 고갯길을 무난하게 넘어갔다. 며칠 전 내린 첫눈이 길가에 남아있는 초겨울 차가운 날씨임을 감안하면 타이어 성능은 무난함 이상이라고 해야 한다. 차가운 날씨에, 공기압은 규정치보다 조금 더 높았지만, 노면 그립을 잃지 않고 와인딩 로드에 지지 않고 고갯길을 넘었다.
인포테인먼트 시스템도 보강됐다. 안드로이드 오토, 애플 카플레이에 모두 대응할 뿐 아니라 핸드폰 두 개를 블루투스로 연결할 수 있다. 보스 오디오를 통해서는 빵빵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실내가 대체로 조용한 편이어서 들리는 음악의 질감이 더 좋다.
터치식 스크린은 손가락 두 개로 화면 축소 확대를 할 수 있다. 직관적이고 편하다. 또한, 선명하게 보인다. 파스텔톤의 연한 컬러가 선명하게 보이는 게 신기할 정도다.
운전이 참 편했다. 쭉 뻗은 직선로, 강원도의 굽이굽이 돌아가는 고갯길, 오르막과 내리막길에서 쳐지지 않는 힘을 구사하면서도 다루기가 쉽다.
에코 노멀 스포츠를 선택하는 주행모드, 심지어 가속페달의 킥다운 버튼까지 생략됐다. 없다. 운전자는 그냥 스티어링휠과 두 개의 페달만으로 운전하면 된다. 가속페달을 깊게 밟으면 스포츠 모드고, 살짝 걸치면 에코모드가 된다. 신경 쓸게 적으니 운전도 편해진다.
서킷에서 잠깐 타본 1.3은 재미있다. 쉐보레는 1.35 터보라고 부르지만, 그냥 1.3이 맞겠다. 그래도 굳이 따진다면 배기량이 1,341cc이니 1.35가 아니라 1.34라고 해야 맞다. 어쨌든 소형차에서나 쓰일 것 같은 이 작은 엔진이 중형 세단을 거뜬히 끌고 서킷을 질주했다. 심지어 1.5인 구형 모델과 달리기 시합에서 이기기까지 한다. 156마력의 힘을 우습게 볼 건 아니다.
그 힘을 조율하는 건 체인벨트로 구동하는 무단변속기다. 낮은 속도에서부터 강하게 차체를 몰아붙이면서 가속하는 움직임이 인상적이다. 오히려 코너에서 가끔 낭창거리는 서스펜션이 안쓰러웠다.
다운사이징 대신 라이트 사이징이라고 쉐보레는 표현했다. light가 아닌, Right sizing 즉 최적화인 셈인데, 결국 다운사이징이다. 다운사이징의 최고봉이라 할만한 엔진이다. 적어도 중형 세단에 적용되는 이보다 더 작은 배기량의 엔진이 당분간은 없지 않을까 싶다.
3기통이다. 소음과 진동에 취약한 구조. 여기에 터보를 얹어 큰 힘을 만들어 냈다. 내구성을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겠다. 처음 등장하는 의미심장한 엔진이 미국 아닌 한국을 데뷔 무대로 택했는지 의문이다.
136마력짜리 1.6 디젤은 위스퍼 엔진이라는 이름답게 조용했다. 4,000rpm으로 치고 올라가는 와중에도 그리 시끄럽지 않았다. 서킷을 달리기엔 힘이 조금 부족한듯했지만, 15.3km/L이라는 우수한 연비를 보면, 마음이 흔들릴 수 있겠다.
판매가격은 1.3T가 2,345만~3,210만 원, 2.0T가 3,022만~3,279만 원, 1.6D가 2,936~3,195만 원이다. 기존 모델 대비 100만 원 정도 가격을 내렸다고 쉐보레는 강조했다.
한판 붙어보겠다는 의지일까. 경쟁차종인 현대차 쏘나타와 거의 겹치는 가격대다. 어코드, 캠리 등 일본 중형 세단들과도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차는 좋다. 차분하게 앉아서 공부할 생각 없이 집 밖으로 나갈 생각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한국지엠’에 비하면 말리부는 참 좋은 차다.
오종훈의 단도직입
미국에는 9단 변속기가 적용된다. 한국에선 왜 6단 변속기일까. 도심에서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한국과 같은 교통환경에서는 6단이 적합하다는 게 한국지엠의 설명. 가격부담도 한 원인이라고 덧붙였다. 예전과 다름없는 설명이다. 한국지형에는 9단보다 6단이 어울린다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가격부담을 덜기 위해서라는 설명이 좀 더 솔직해 보인다. 어쨌든 한국 소비자들은 9단 변속기를 단 말리부를 만날 기회를 또 놓쳤다.
수동변속을 하는 토글 스위치는 정말 난감했다. 서킷 주행할 때 수시로 수동변속을 하고 싶었지만, 엄지손가락을 토글에 걸기가 쉽지 않아 나중엔 포기하고 그냥 달렸다. 패들 시프트를 쓰면 좀 나으려나? 그조차도 없어 아쉽다.
오종훈 yes@autodia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