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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병을 잡은 F1 드라이버. 어울리지 않는 조합.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야르노 트룰리. 이탈리아 출신의 F1 로터스팀의 퍼스트 드라이버. 시속 300km를 넘나드는 속도로 서킷을 달리는 그는 몇 년의 세월을 기다리며 와인을 빚는 와인 사업가기도 하다. 빨리 달려야하는 레이서, 술이 익기를 기다리는 와인 사업가. 야르노의 두 모습이다.
12일, 김포공항 출국장을 빠져나오는 야르노는 피곤에 찌든 모습이었다. 일본 그랑프리 경기를 끝내자마자 중국을 거쳐 한국GP를 위해 입국하는 길. 작년에 이어 이번 방문이 두 번째 한국을 찾은 것이다. 김포공항에서 그를 맞아 삼청동의 허름한 와인바로 자리를 옮겼다.

백전노장. F1에서 그는 백전노장이다. 251회를 넘는 출전기록을 가진 그는 F1 그랑프리의 현장을 누벼온 베테랑 드라이버다. 그보다 출전 경력이 많은 드라이버는 슈마허가 유일하다. 8살 때 고카트로 트랙을 달리기 시작한 그는 97년 F1에 입문한다. 미나르디, 프로스트, 죠단, 르노, 토요타 팀을 거쳐 2010년 신생 로터스팀으로 옮겼다.
98년 유럽GP에서 2위를 차지 처음 포디엄에 오른 뒤 2004년 모나코 GP에서 생애 첫 F1 우승을 차지했다. 독일, 말레이시아, 바레인, 프랑스, 호주 GP 등에서 2, 3위로 시상대에 오르기도 했다. 2009년을 마지막으로 토요타가 F1에서 철수를 선언하자 그는 신생팀 로터스에 둥지를 틀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전성기는 아니다. 2010년 코리아GP 결선에서는 기어박스의 문제로 완주하지 못했고 올 시즌도 18위에 머물고 있다. 썩 좋은 성적은 아니지만 그는 욕심을 내지 않았다. “올해는 완주가 목표”라고 그는 말했다. 로터스가 신생팀인 만큼 머신의 완성도를 높인 뒤 성적에 욕심을 내겠다는 말이다.

전세계를 누비며 F1 서킷을 내달리는 인생을 살아온 그가 와인 사업에 손을 댄 건 몇 해 전. 이탈리아 로마 동쪽 아부르조 지방의 오래된 와이너리를 인수한 것. 그의 와이너리에서는 50여종의 와인을 생산한다. 어릴 적부터 친구인 그의 매니저 루치오 카부토와 함께 “안 팔리면 우리가 다 마셔버리자”며 와인 사업을 시작했다고.
첫 해에 1만 8,000병을 생산했고 지금은 100만병을 생산할 만큼 사업은 커졌다. 이탈리아 올해의 와인에 선정될 정도로 성장했다. 모두 27개 브랜드로 거의 대부분의 와인종류를 만들어 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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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만드는 최고의 와인 이름은 ‘야르노’다. 자신의 이름을 붙인 건 그만큼 애정을 쏟았고 자신이 있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분신’ 같은 와인이다. 와인 ‘야르노’를 만드는 포도는 한 달정도 늦게 10월말쯤 수확한다. 수확한 포도는 건포도 상태로 말린다. 수분은 다 날려버리고 당분만 남게 하는 것. 이 건포도로 45일을 발효시켜 와인을 만들어 낸다.

‘야르노’ 화이트 와인은 세 가지 품종의 포도를 섞어 만드는데 아주 깔끔하고 부드러운 맛을 낸다. 특히 목 넘김을 한 뒤 입안에 감도는 부드럽고 개운한 뒷맛이 일품이다.

‘야르노’를 포함해 그가 만든 와인 4종류가 올 연말 코리아 와인 앤 스피릿(대표 도윤섭)을 통해 한국에 소개될 예정이다.

야르노 트룰리. F1이 꽃미남으로 불리며 서킷을 누비던 그가 와인병을 들고 기자들 앞에서 아주 세세하게 ‘와인’을 설명하는 건 분명 낯선 모습이었다. 어쩌면 그는 은퇴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 소셜 네트워크 페이스북에서 만날 수 있는 야르노 계정은 그와 아무 상관이 없다. 마치 야르노가 직접 운영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계정에 대해 그는 “나와 아무 상관없다”고 말했다. 누군가 그를 사칭하고 있는 것이다.
인터뷰를 마친 뒤 그는 팀에서 예약한 ‘에쿠스 리무진’에 몸을 싣고 전남 영암으로 향했다. “시속 200km 미만으로 달리는 방법을 몰라서” 그가 직접 운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게 매니저의 말이다. 그는 소박했다.피곤에 찌든 모습이 역력했지만 질문에 성의를 다해 답했고, 카메라 앞에서는 활짝 웃어주는 서비스 정신도 투철했다. 점심식사를 마칠 때쯤 그를 알아보고 달려나와 악수를 청하는젊은 직원에겐 큼직한 사인도 해줬다. 전세계 28명 밖에 없다는 F1 드라이버의 거만함 따위는 적어도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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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훈 yes@autodia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