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형의 하이빔 37] 정의선 상무의 첫 품평회
올해 1월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된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 전시회인 ‘CES 2023’ 관련 기사를 보던 중 여기에 참가한 국내 모 대기업의 상무에 관심이 집중되었다는 내용을 봤다.
요즘 세계적으로 뜨고 있는 전시회이다 보니 모터쇼보다도 더 관심이 큰 만큼 국내 대기업도 대거 참석했고, 당근 각사의 사장단 및 고위 경영진도 많이 참석했을 텐데 상무급 한 명 참석했다고 관심이 집중된 건 아닐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타 대기업에 비해 그룹 공식 석상 등에 모습을 자주 나타내지 않아 잘 알려지지 않은 “오너 3세” 상무이기 때문이었다.
싼타페 발매 준비 등 업무에 하루하루 바쁘던 1999년경, 지금 현대자동차 그룹의 총수가 된 양반이 현대자동차 국내 영업본부 상무로 부임을 했다. 공식 직책이 ‘국내영업본부 영업 담당 겸 기획총괄본부 기획 담당 상무’였다. 직책이 이렇게 긴 것을 보니 상당히 바빴겠다.
신임상무가 오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매달 열리는 남양연구소의 정기품평회 날짜가 결정되었는데 품평보다도 연구소는 신임상무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냥 상무가 아니니 말이다. 현대차는 지금도 부사장이 되어야 회사에서 업무용 차와 운전기사가 지원된다. 그런데 지금부터 무려 20여 년 전에 차와 기사가 지원되는 상무라니.
국내영업본부 소속인 나에게도 선후배 관계없이 문의가 엄청 많이 왔다.
“너는 그나마 다른 부문보다 그 양반하고 가까운 사이가 아니냐”는 이유였다. 아니 같은 본부라고는 하지만 신임상무하고 이야기해본 것도 몇 마디 안 되고 하물며 같이 밥이나 술을 먹어본 것도 아닌데 어찌 알겠는가.
궁금한 것도 부문마다 달랐다. 품평을 주관하는 프로젝트팀, 제품기획팀, 디자인팀 등은 ‘품평차에 대해 무엇을 물어볼 것인가, 그와 연관된 질문은 무엇을 할까?’ 하는 것 등이었다. 그래야 당연히 관련 자료를 준비하고 질문의 예상 답변을 작성할 것 아닌가.
신임상무의 주량, 기호, 식성을 묻는 이들도 있었다. 주량이 얼마인지. 술은 어떤 종류를 즐기는지. 회를 좋아하는지 고기를 좋아하는지 등등….
품평의 날이 왔다.
연구소에 도착하니 평소와는 분위기가 다르게 긴장된 분위기라고나 할까. 평소에 못 보던 양반들까지 나와서 나에게도 살갑게 대하는 것이 아닌가. 평소에는 골치 아픈 요구만 한다고 구박하던 국내영업본부를 대하는 태도가 왜 이리 부드럽고 친절한지 같이 간 후배가 놀라는 분위기였다.
지금은 남양연구소의 디자인 센터가 자연채광 지붕까지 갖춘 첨단 시설을 자랑하지만, 그때만 해도 디자인 센터가 완전히 정리가 되지 않아서 주행시험장 가운데 직선 주행로가 있는 야외 범용시험장에 품평 차량을 가져다 놓고 평가도 하고 시승도 하곤 했었다. (겨울에는 얼어 죽고 한여름에는 더워 죽는다는 그 전설의 시승장에 휴식 공간도 한참 나중에야 생겼다)
통상적으로 경영층 품평을 하게 되면 사장 이하 각 본부장(연구소는 연구소장)과 그 아래 관련 부문의 실장, 팀장, 담당자들이 참석한다. 품평 진행은 해당 차종 프로젝트팀에서 실장급이 주관해서 하지만 내용이 디자인 사항이면 디자인팀에서, 사양(부품) 관련 사항이면 설계팀 등에서 실질적인 세부 설명을 하게 된다. 그날은 엑센트급 소형차의 페이스리프트 품평으로 기존 차에서 변경되는 부위에 대한 설명과 해외 경쟁차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품평장에 도착하니 신임상무가 이미 도착해서 품평차 및 해외 경쟁 차를 둘러보고 있었다. 경쟁차와 우리 차의 비교 등 품평 항목 이외의 일반적인 사항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물어보곤 했다.
품평이 시작되어 프로젝트 실장이 품평차 앞에 놓인 브리핑 차트를 보면서 참석자들에게 열띤 설명을 하고 있는데 내 옆의 연구소 선배가 옆구리를 찌르면서 나에게 넌지시 소리죽여 물어왔다.
“도대체 오늘 품평은 대장이 누구야?” 하고 말이다. “무슨 소리?”하면서 지휘봉을 들고 설명하는 프로젝트 실장을 보니 왜 선배가 그렇게 질문을 했는지 이해가 갔다.
실장의 맞은편에 사장, 연구소장 및 국내영업본부장 등이 서 있는데 실장은 정면이 아닌 옆 방향을 바라보면서 누군가를 향해 열심히 브리핑하고 있었다. 그 방향에는 당연히 신임상무가 서 있었고.
브리핑하던 프로젝트 실장도 어느 방향을 향해 보고해야 할지 혼란스러웠으려나? 질문도 신임상무가 하기 전에는 아무도 하지 않았고 주로 신임상무 위주로 품평이 진행되었다. 물론 아직 상품에 익숙지 않은 신임상무가 정책 결정을 하지는 않았고.
품평이 끝나고 한참 뒤 연구소의 제안으로 신임상무가 참석하는 회식이 열렸다. 품평에 참석한 부장급 이상을 대상으로 사장단까지 50명 가까이 참석했다. 연구소 근처 횟집을 통째로 빌렸는데도 좁아서 내실에는 본부장급 이상이 들어가고 부장급들은 홀에 쪼그리고 둘러앉았다.
내실에서 노인네들(!)과 한담을 나누던 상무는 홀로 나와서 부장급들 자리에 끼어 앉아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적어도 30명 가까운 직원들과 술잔을 주고받았으니 반 잔씩만 받았어도 적지 않은 양을 마신 셈이었다. 그렇게 마시고도 서울에서 친구들과 술 약속이 있다고 양해를 구하고 먼저 자리를 뜨는 것을 보니 비록 소문으로 듣던 정몽구 회장의 주량을 닮긴 닮은 것 같았다.
그 신임상무는 지금 현대차그룹의 회장이다. 전 세계 자동차산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힌다는 소식을 들으며 그와 처음 함께했던 품평회의 기억을 떠올려 봤다.
2021년 7월 정몽구 명예회장이 세계 자동차산업 최고 권위라는 ‘자동차 명예의 전당(Automotive Hall of Fame)’에 한국인 최초로 헌액되었다.
갤로퍼를 개발하던 시절이나 현대자동차의 회장으로 취임했던 당시 정몽구 회장이 보여준 열정을 생각해 보면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명예의 전당 헌액 한 해 전인 2020년,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명실상부한 현대자동차 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가 전 세계 자동차산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히리라고 예상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능력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너무 큰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고.
유재형 <자동차 칼럼니스트>
필자 유재형은 1985년 현대자동차에 입사, 중대형 승용차 상품기획을 맡았으며 현대모비스 전신인 현대정공에서 갤로퍼, 싼타모 등의 개발에 참여했다. 이후 현대자동차로 옮겨 싼타페, 투싼 등 SUV 상품개발과 마케팅을 거쳐 현대자동차 국내 상품팀장을 끝으로 퇴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