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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형의 하이빔] 25. 현대차의 실수? 베라크루즈 개발에 얽힌 이야기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현대의 실수(?)라는 차 이야기가 있다. 그렇게 문제 많다는 현대자동차의 차중에서 의외로(실수로) 잘 만들어진 차들이 있다는 것이다.

i30, i40, 베라크루즈 그리고 1세대 제네시스(BH) 등이 꼽히는데 그 공통점은 기존 차에 비해 그 개발목적이 뚜렷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현대차 차량 개발목표가 어느 지역에서나 두루 팔 수 있는 차를 개발하는 것이었다면, i30는 본격적인 유럽 시장 공략, 베라크루즈는 북미 시장 대응, 제네시스는 수입차 대응을 위한 현대 최초의 고급 차 시장 공략을 위한 차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목표가 뚜렷한 만큼 목표를 반드시 달성하기 위해 타협(!)이 없었던 차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중 국내 최초의 대형 SUV이었던 베라크루즈의 개발과정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2000년 6월 출시해 국내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던 싼타페는 SUV를 애타게 기다리던 북미 딜러와 소비자에게 환영받으며 현대자동차의 북미 시장 확대에 큰 역할을 한다. 싼타페를 북미 시장에 내놓을 즈음, 미국의 샌디에이고에서는 테라칸의 북미 시장 진출 가능 여부를 타진해 보기 위해 시장조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소비자들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고, 결국 수많은 추가 시장조사와 딜러들의 의견 등을 반영해 새로운 대형 SUV를 개발하자는 의견이 다수였다.

그러나 싼타페와 달리 베라크루즈의 개발에 대한 북미 딜러들의 기대는 높지 않았다. 전통적인 프레임형 대형 SUV와 픽업이 주축을 이루는 북미 SUV 시장에 일본 메이커를 주축으로 RAV-4, CR-V 등의 소형 SUV 시장이 확대되고 있었고 또 렉서스 RX350 등 고급 SUV 시장도 커가는 상황이었다. 현대가 대형 프레임 SUV 시장에 도전하기에 GM, 포드 등 북미 전통 브랜드의 장벽이 너무 높았고 고급 SUV 시장에서 렉서스, BMW 등과 경쟁하기에는 시기상조였다.

SUV 라인업이 없어 안달하던 딜러들도 싼타페 투입으로 어느 정도 만족하는 상태였기에 대형 SUV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상관없는 상황이었고, 국내에서도 과연 싼타페보다도 크고 가격도 1,000만 원 정도는 더 비쌀 듯한 SUV가 얼마나 팔릴지 반신반의하는 상황이었다.

제품의 개발 콘셉트도 이리저리 흔들리며 갈피를 못 잡았다. 대형차라는 이유로 예상 판매 수량도 많지 않아 수익성이 나쁘게 나오니 원가 부문에서는 별로 달린 것도 없는 기본 차의 목표가격을 계속 올리라고 성화였다. 농담 삼아 아반떼 한 대 값이라는 V형 6기통 디젤엔진이 들어가니 가격은 가격대로 올라가고 아무리 콤팩트하게 잘 설계했다고 해도 3.0 리터 디젤엔진이 들어가니 엔진룸과 차체는 중후장대하게 커졌다. 덕분에 베라크루즈의 차폭이 그 당시 국내 최대의 차폭을 자랑하던 기아 카니발에 버금갈 정도로 넓었다. 당시 카니발의 전폭이 1,985mm, 베라크루즈의 전폭이 1,970mm였다. 당시 구형 에쿠스의 전폭 1,870mm보다 넓었다. 운전석에서 조수석 도어 트림에 있는 물건을 가져오려면 팔이 안 닿을 정도로 넓은 차폭은 주차에는 불편할 수 있었으나 넓은 윤거로 고속 도로 등에서의 주행 안전성과 승차감을 좋게 한 현대의 실수(?) 중 하나였다.

개발이 진행될수록 점점 베라크루즈는 비쌀 수밖에 없는 차가 되어가고 있었다. 싼타페의 플랫폼을 활용했다고는 하지만 고가의 3,000CC 디젤엔진에 변속기, 북미 수출용 람다엔진을 적용한데다 북미에서 필요로 하는 트레일러 견인을 위한 차체보강 등 기초단계에서 이미 원가는 한계를 모르고 올라갔다.

원가를 반영해 추정한 대략의 목표 판매 가격을 접한 북미의 딜러들은 혼비백산, 가격상승을 반대하다 보니 사양 수준은 싼타페만도 못한 차가 만들어져 가고 있었고 그렇다고 만족할 만한 가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당시 북미의 딜러는 현대의 SUV가 3만 달러를 넘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내수는 내수대로 사면초가였다. 대강의 가격대를 들은 영업 부문에서는 그래가지고 몇 대나 팔겠나 하는 표정이었다. 그냥 만들어주면 싼타페 최고급 모델 팔듯이 몇 대 팔리겠네 하는 입장이었으니.

그렇다고 대형차체에 고성능 디젤엔진을 탑재한 차를 싼타페만도 못한 사양 수준으로 내놓으면서 4,000만 원을 받으면 과연 소비자들은 뭐라고 할까? 어차피 적은 양을 판매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현대 SUV의 이미지 리딩 모델로 파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내수는 사양 수준을 대폭 올리는 방향으로 상품계획을 변경했다. 그러나 내수 상품계획 변경에 수출은 강하게 반발했고 어차피 북미를 주 판매시장으로 설정하고 개발하는 것이니 북미의 입김이 더 강하게 받아들여졌다.

예를 들면, 남양 디자인센터에서 차체 일체형의 사이드 가니쉬와 사이드 스텝을 적용하자고 하면 내수에선 환영, 북미에서는 부정적이었다. 개발을 반대하는 건 아니어도 가격반영은 어렵다고 하기도 하고 (이게 무슨 심보인가. 봉이 김 선달도 아니고 말이다. 그럼 그 원가 상승분을 내수에 다 얹으라는 이야기?)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소식이 하나 들려왔다. 경영수업 중인 정의선 부사장이 기아차 대표이사 사장으로 간다는 이야기와 기아 차의 모든 라인업을 대폭 강화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중 하나, 기아도 북미 시장 공략을 목표로 대형 SUV를 개발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바디온 프레임 타입 SUV로 프로젝트명 HM, 모하비였다.

현대차의 반발은 컸다.
베라크루즈 한 대만 가지고도 과연 몇 대나 판매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또 한 대를 추가한다니 다 같이 죽자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야말로 공깃밥 한 그릇을 장정 둘이 나눠 먹으라는 꼴이 아닌가 말이다.

분위기는 이상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조금만 가격 인상 요인이 생기면 펄쩍 뛰던 상황에서 어차피 몇 대 안 팔릴 고급모델이니 가격에 걸맞게 고급화하는 방향으로 개발 방향이 바뀌었다. 북미에서 고급모델로 인기였던 렉서스의 RX350을 벤치마킹해 실내정숙성을 대폭 향상 시킨 것도 현대의 실수(!) 중 하나였다.

베라크루즈와 모하비의 개발 경쟁도 더해졌다. 심지어 모하비는 지금의 제네시스 GV80에도 적용하지 않는 에어서스펜션을 후륜에 적용하기도 했다. 베라크루즈는 모하비에 없는 파워테일게이트를 적용하기도 하고. 두 차종이 경쟁적으로 사양을 적용하다 보니 마치 신기술 적용 시험장처럼 되어 이것저것 새로운 기술들이 추천되기도 했다.

한 예로, 요즘 애프터마켓에서 판매하는 워셔액 히팅시스템도 제안되어 시험을 하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핫샷(HOT-SHOT)이라 불렀는데 잔디밭에 세워두었던 시험 차의 워셔히터(차체하부에 장착)가 과열되면서 잔디에 불이 붙어 차가 전소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양산 차에 적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런저런 혼란을 거쳐 국내시장에는 2006년 10월, “The LUV 베라크루즈”라는 런칭 콘셉트와 함께 발매되었다. 기존 SUV가 아닌 LUV(Luxury Utility Vehicle)라는 타이틀로 세계의 럭셔리 SUV와 본격 경쟁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말이다.
비록 오일누유, 2열의 승차감 부족 등 문제점도 지적되었지만 뭐니 뭐니 해도 베라크루즈의 장점(실수)은 커다랗고 넓은 차체에서 나오는 승차감, 주행 안정성, 실내정숙성 그리고 250마력에 가까운 고성능 V6 디젤엔진에서 나오는 넉넉한 주행 성능을 들 수 있다. 비록 많이 팔리지는 않았지만 베라크루즈는 지금도 중고차 시장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현대의 실수(!) 차종 중 하나임은 틀림없다.

유재형 <자동차 칼럼니스트>

필자 유재형은 1985년 현대자동차에 입사, 중대형 승용차 상품기획을 맡았으며 현대모비스 전신인 현대정공에서 갤로퍼, 싼타모 등의 개발에 참여했다. 이후 현대자동차로 옮겨 싼타페, 투싼 등 SUV 상품개발과 마케팅을 거쳐 현대자동차 국내상품팀장을 끝으로 퇴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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