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현대차의 중국 합자회사인 북경-현대(베이징-현대)는 기존 EF 쏘나타의 중국전용 개선모델인 ‘밍위(또는 MOINCA라고 부른다)’를 내놓으며 언론에 대대적인 홍보를 했다.
북경-현대의 많은 차종 중에 밍위가 갖는 의미는 무엇이었나?
중국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거대한 중국 시장을 보고 몰려오는 글로벌 업체들을 대상으로 국가 차원에서 높은 수입차 관세(22.5%)를 부과해 자연스럽게 중국 현지생산을 유도했다. 또한 외국계 기업의 100% 지분투자는 금지하고 중국기업과의 합작투자만 허용하는 정책을 세웠으며 중국에 투자하고자 하는 외국기업에게 ‘기술이전과 부품의 현지조달’이라는 조건을 내걸어 중국 자동차 산업의 육성, 궁극적으로는 독자적으로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자 했다.
우리가 미쓰비시에게 차를 배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처럼 중국도 우리에게 차를 배우기 위해 애썼던 당시의 기억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2008년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인한 국제금융위기로 온 세상이 시끌시끌하던 당시, 나는 기획실 소속으로 북경-현대와의 기술지원계약 실무협상을 위한 출장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북경-현대는 그동안 한국에서 판매되는 모델을 그대로 가져다 생산만 하던 체제에서 벗어나 중국전용 모델을 투입하는 단계에 접어든 상황이었다.
그 첫 번째로 기존 아반떼 HD를 중국인의 기호에 맞춰 개선한 중국전용 모델 ‘위에둥(HDC, HD China)’이 2008년 4월에 출시되었고 NF 쏘나타의 중국 전용 모델 ‘링샹(NFC, NF China)’을 연말에 내놓을 예정으로 마지막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또 세 번째로 내놓을 중국 전용 모델 EFC(또는 BT-01)를 위한 준비도 진행되고 있었다. 이 모델이 밍위다.
밍위는 기존 EF 쏘나타를 중국 상황에 맞게 개조했다는 의미로 EFC라는 코드가 붙었지만, 또 별칭으로 BT-01 이라는 코드를 부여하기도 했다.
밍위는 북경-현대의 첫 번째 자체 개발 모델로 중국의 기술연구소에서 내. 외관 디자인 및 테스트를 수행한 차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HDC나 NFC는 중국 전용 모델이지만 남양 연구소에서 개발한 차로 단지 중국 시장에 특화된, 한국에서는 팔지 않는 차라는 것만 다르다.)
2002년 북경-현대 합자회사 설립 때의 계약대로 이미 2006년 기술연구소는 설립되었으나 연구소 업무는 아직 기본적 수준의 단계였고 특히 디자인 연구소가 없었기 때문에 새롭게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앞의 HDC, NFC와는 다르게 현대자동차에 지적재산권이 있는 EF쏘나타를 북경-현대에서 임의로 변경하는 것이므로 미쓰비시가 갤로퍼 판매 대당 받았던 것처럼 로열티를 산정해서 받아야 하고 또 차량 개발 중에 필요한 기술적 지원에 대해서도 기술지원료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과연 얼마를 받아야 할지 참조할만한 사례와 가이드가 없다 보니 난감한 상황으로 같이 출장을 갈 후배 부장과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짰다. (미쓰비시가 놈들이 우리에게 갤로퍼 로열티와 기술지원료를 받아 갈 때는 어떻게, 무슨 근거로 계산을 했을까?)
이미 EFC 프로젝트는 실무업무가 진행되고 있었고 남양연구소의 디자이너도 북경-현대로 발령을 받아 중국연구소에서 스타일링 및 품평을 위한 모델 제작 준비에 들어간 상태여서 기술지원계약도 빨리 진행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사실은 계약이 먼저 되고 나서 실무업무가 진행되어야 하지만 사정상 외상으로(?) 먼저 진행되고 있었다.
일단 후배 부장과 함께 북경으로 향했다. 지주회사 쪽에서 우리를 위해 조선족 여자 변호사를 지원해줬다. 출장 기간의 차량 운전 등 편의를 위해 생산관리부의 대리 한 명도 지원 나왔다.
첫날은 북경-현대 쪽 협상 대상 인원들과 상견례를 하고 남양 디자인센터에서 북경-현대 기술연구소의 디자인팀 담당으로 파견 온 디자이너와 만나 현재까지의 진행 상황을 듣는 등 전체적인 진행 상황을 파악했다.
다음날부터 연구소와 협의를 시작하는데 연구소 측에서는 중역, 부장급이 참석했고 재경 부문, 그리고 북경-현대의 총무 부문에서 장 부장이라는 직원이 참관하는 방식으로 참여했다. (협의 대상도 아닌데 참관은 또 뭔가 의아했다.)
알고 보니 이 양반이 북경-현대의 실세(?)였다. 직급은 부장이지만 공산당 당원으로서 회사 내·외의 궂은일이나 대관업무 등을 해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등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친구로 이전에는 북경시청에서도 근무했고 다른 합자 자동차회사에서도 근무한 경험이 있는 등 그야말로 중국 정부에서 키우는 차세대 인재라고 할 수 있었다. (듣기로 나중에 다시 북경시청으로 옮겨 고위직까지 지냈다고 한다.)
예상했던 대로 협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돈 받을 놈은 당연히 많이 받으려고 하고 돈 줄 놈은 한 푼이라도 핑계를 대고 깎으려고 하거나 이것저것 억지 조건을 달기도 해 협의는 지지부진했다.
오전의 지지부진한 회의 시간이 지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장 부장이 나와 후배 부장, 그리고 조선족 대리를 데리고 점심을 먹으러 외부로 나갔다,
한 십여 분을 달려 으리으리한 중국음식점에 도착해 안내를 받아 들어가니 수십 명은 들어갈 만한 방에 한가운데 덩그러니 원탁 테이블 하나와 의자 4개만 준비되어 있었다. (중국 영화에서 보던 무슨 조폭들 회담장 같다고나 할까.)
장 부장은 차의 트렁크에서 마오타이주 등 고급 중국술을 가지고 들어와 서빙 하는 여직원에게 준비를 부탁했다. 장 부장의 이야기인즉 술집에서 나오는 술도 가끔 가짜나 불량품이 많아 잘못 마시면 눈이 멀기도 한다고 허풍을 떨면서 그래서 귀한 손님을 위해 이렇게 직접 술을 가지고 다닌다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
음식을 먹으면서 거의 1리터에 가까운 독주를 세 명이(운전담당 대리는 못 마시고)다 마셨던 것 같다. 중국 사람들이 비즈니스 하면서 점심때도 술을 많이 마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장 부장과는 업무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가만히 보니 이 친구는 전반적인 협상 진척 사항이나 우리 측의 태도 등을 중국 측 고위경영진에 보고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실제 회의 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같은 편인 중국연구소 사람들도 장 부장 눈치를 보는 것 같아 이해가 안 되기도 했다.
회의가 끝나면 그날의 회의 내용을 우리와 변호사가 정리해서 그 내용을 양쪽이 나눠서 각자 양측 경영층에 보고하고 지시를 받아 다음날 다시 회의하는 일정이 반복되었다.
결국 출장 기간에 협의가 완료되지 못해 다음 기회에 다시 협의하기로 하고 돌아오고 2주 정도 후에 그간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을 가지고 다시 북경으로 갔다.
북경에 도착하니 담당 디자이너가 사색이 되어있었다.
디자인 품평 준비를 위해 중국연구소에서 소개한 모델 제작회사에 의뢰했는데 잘 진행된다는 이야기만 하다가 갑자기 못하겠다고 드러누웠다는 것이었다. 정몽구 회장 중국공장 방문에 맞춰 품평 일자도 잡혀있는데 담당 디자이너는 실신하기 직전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한국의 제작업체에 긴급으로 발주해 항공으로 공수해 간신히 일정을 맞췄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중국에서 차를 개발하는 주변 인프라는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북경 현대 측에서는 또, 남양연구소 파견근무를 요청해 오기도 했지만 기술 유출을 우려한 연구소가 강력하게 반대해 견학 수준으로 회사가 조정하기도 했다.
몇 차례 출장을 가는 우여곡절 끝에 금액은 기억이 안 나지만 간신히 기술지원계약 협의를 마치고 양사 경영진의 결재를 받아 EFC 개발은 정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중국은 우리에게 그렇게 차를 배웠다.
북경-현대뿐만 아니라 다른 글로벌 자동차회사와 합자한 중국 자동차회사들도 합자 후 10~15년 후에는 독자적으로 자동차를 개발할 능력을 갖췄다고 한다.
유재형 <자동차 칼럼니스트>
필자 유재형은 1985년 현대자동차에 입사, 중대형 승용차 상품기획을 맡았으며 현대모비스 전신인 현대정공에서 갤로퍼, 싼타모 등의 개발에 참여했다. 이후 현대자동차로 옮겨 싼타페, 투싼 등 SUV 상품개발과 마케팅을 거쳐 현대자동차 국내상품팀장을 끝으로 퇴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