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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형의 하이빔] 22. 미쓰비시의 기억, 우리는 그렇게 차를 배웠다.

얼마 전 미쓰비시 파제로를 생산하는 마지막 공장이 올해 7월에 폐쇄됐다는 기사를 봤다. 파제로는 2019년 이미 일본 내수판매를 중단했고 이번 공장폐쇄로 해외수출까지 끝내며 파제로의 시대는 그 막을 내렸다.

1982년 탄생해 40년이란 기간 동안 미쓰비시 RV의 대표역할을 해온 파제로는, 온로드 위주인 요즘 SUV의 바람을 거부하고 단종 되는 순간까지 일관되게 오프로드 주행 위주로 설계된 차다.

파제로는 정몽구 회장이 차량 사업을 시작하는 첫 번째 차였던 갤로퍼의 베이스 모델이었으니 현대차와도 인연이 깊은 차다. 갤로퍼 상품 담당자였던 필자는 파제로의 단종 소식에 감회가 새로웠다.

미쓰비시 자동차가 아직도 안 없어졌나?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미쓰비시 자동차는 2016년 르노-닛산 얼라이언스 산하의 자회사로 편입되어 브랜드의 명맥은 유지하고 있다.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에 편입되기 전인 2016년 이전까지는 연간 90~100만대 수준을 판매했고 2020년에는 코로나19 영향 때문인지 60만대 수준에 불과했다. 이는 현대/기아의 1/10에 불과한 수준이다. 격세지감이다. 미쓰비시 자동차의 미국 홈페이지를 보니 판매 차종이 단 6종으로 달랑 한 페이지에 불과했다. 현대는 몇 페이지 넘겨야 한다!

현대정공이 갤로퍼 생산을 위해 파제로 기술도입을 검토하던 90년대 초, 토요타에 이어 일본 2위의 자동차 회사인 닛산이 버블붕괴로 고전하던 때 미쓰비시는 ‘RV 붐’을 타고 사륜구동차, 경차 등에서 연속히트를 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95년경에는 닛산을 거의 추적하기에 이를 정도였다. 그 후 무리한 성과 위주의 경영뿐 아니라 온 세상이 시끄러웠던 리콜 은폐, 연비 조작 등 연이은 악재로 결국은 남의 회사에 편입되기에 이른다.

현대자동차가 1975년 독자 모델인 포니를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은 미쓰비시 자동차와의 기술제휴 결과에 의한 것으로 당시 현대자동차에게 미쓰비시는 설계, 부품, 생산기술 등 모든 분야에서 절대적인 대상이었다.

80년대 중반 현대자동차에 입사해보니 연구소, 공장 등 자동차 생산과 직접 관련 있는 부문은 물론, 본사의 부품, 정비 등에서도 일본어 몇 마디하고 간단한 일본어 문서 정도는 읽어야 윗사람들이나 선배들에게 사람 취급을 받던 시절이었다. (퇴근 후 종로5가 기독교방송국에서 일본어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난다)

공장이나 연구소에 가면 여기저기 회의실에서 일본에서 온 고문이나 기술자들과 회의를 하는 풍경이 흔했다. 생산라인에서도 미쓰비시에서 온 머리 희끗희끗한 할아버지가 직원들을 삼삼오오 모아놓고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이야기하고 직원들은 열심히 받아 적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연구소의 보고서를 보면 보고서 뒷면에 미쓰비시에서 온 문서(당연히 일본어) 원본이 첨부되어 있었다. 결국 보고서라는 것이 미쓰비시에서 온 문서를 번역하고 덧붙인 것에 불과한 것도 많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미쓰비시에서 부품을 들여오는 자재 부문의 입사 동기가 일본어로 유창하게 국제전화를 하는 것을 보고 저놈은 왜 저렇게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내나하고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내심 부럽기도 했다.

미쓰비시와 공동으로 개발한 그랜저(데보네어 2세대)가 1986년 출시되었고 3년 후인 1989년에는 V6 3.0 엔진을 탑재한 최고급 형 모델이 추가됐다. 86년 그랜저가 출시되었을 당시는 고위층의 관용차 4기통 제한정책이 있어 2.0, 2.4 모델만 출시했으나 88올림픽 개최를 기점으로 규제가 해제되어 3.0 출시가 가능해졌다.

그 당시 3.0 모델은 대단한 차량이었다. 전자제어방식의 MPI 엔진에 ABS, 차고조절이 가능한 에어 스프링 방식의 ECS (electronic controlled suspension) 등이 탑재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내온도센서로 실내온도를 조절하는 풀 오토 에어컨도 적용되었다. ECS는 요즘도 흔치 않다!

3.0 모델의 발매 준비 과정 중 상품설명서 제작을 담당한 나에게 주어진 자료는 일본어로 쓰여진 간단한 내용뿐이었다. 엔진이나 변속기 등에 관한 자료는 많지만, 편의장비 등에 관해서는 도면은 있어도 설명 자료는 없었다. 세상에 무슨 회사가 차를 만드는데 제품을 설명하는 자료 하나 없다는 말인가. 그 당시에는 그랬다. 차를 만들기 위한 도면은 있어도 그 차를 설명하는 자료는 따로 없었다. 연구소 제품기획팀에서 각 부문의 자료를 취합, 정리해서 상품팀에 지원하게 된 건 한참 지난 후의 일이었다.

아쉬운 놈이 우물 판다고 울산연구소에 내려가 단 한 대밖에 없는 시험차를 한적한 공터에 가지고 가 이것저것 눌러보고 작동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는 달랑 시험차 1~2대 만들어서 시험도 하고 품평도 하고 시승도 하는 등 여러 곳에 사용했다!

지금처럼 디지털카메라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필요한 것은 사진을 찍거나 손으로 작동 순서를 단계별로 그리기도 하고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설계담당자와 도면을 보면서 의논하기도 했다. 연구소 담당자도 미쓰비시에서 자료를 안 줘서 고생이 많았다고 하소연했다. 그 당시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미쓰비시에서 자료를 받아내는 것이 능력이었다.

90년 초, 갤로퍼 발매 준비로 각 부문 사람들과 미쓰비시 본사 출장을 갔었다. 미쓰비시 상품팀의 RV를 담당한 대리와 사원의 기세는 그야말로 그 당시 잘 나가던 미쓰비시의 모습이었다. 동경대 출신의 그 담당 대리는 우리가 뭘 알겠냐는 듯이 병아리 모이 주듯이 자료를 건네주었다.

회의 다음 날은 미쓰비시 자동차의 전시장과 딜러를 견학하게 되어 미쓰비시 측에서 준비해준 미니밴을 타고 교외의 딜러를 방문했다. 자동차 전시장은 물론 전문 튜닝샵, 오프로드 체험 코스, 휴게실까지 갖춘 대형 딜러와 수많은 방문객을 보니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그 모습은 바로 당시 버블붕괴로 승용차가 침체하는데도 RV 시장은 성장하는, 일본 속 미쓰비시의 모습이었다.

부러운 마음을 안고 회사로 돌아와 보고서를 쓰는데 부족한 자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할 수 없이 미쓰비시의 상품담당에게 영어로 주절주절 레터를 보내니 며칠 지나 A4용지 몇 장에 손으로 직접 빽빽이 쓰고 도표도 그린 FAX가 왔다. 고맙게 받아 보고서에 참고하고 추가로 필요한 게 있으면 또 레터를 보내 받곤 했다.

그렇게 지내던 중 재정팀 과장이 보자고해서 갔더니 내 앞에 무슨 청구서 같이 생긴 종이를 내미는 것이었다. 나에게 하는 말이 무슨 자료를 얼마나 요청 했길래 이렇게 많은 금액을 청구하냐는 것이었다. 그럼 그동안 나에게 친절히 손으로 빽빽이 써서 보내준 자료들이 모두 돈 받고 보낸 것이었다는 말인가?

알고 보니 기술제휴 계약을 하면서 도면, 기술자료뿐만 아니라 계약서에 명기된 내용을 벗어나는 내용에 대해서 자료를 요청할 경우에는 추가로 자문료를 지불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종이 한 장에 수십만 원이라니!

그 당시, 우리는 그렇게 차를 배워 하나하나 우리 것으로 만들어갔다.

유재형 <자동차 칼럼니스트>

필자 유재형은 1985년 현대자동차에 입사, 중대형 승용차 상품기획을 맡았으며 현대모비스 전신인 현대정공에서 갤로퍼, 싼타모 등의 개발에 참여했다. 이후 현대자동차로 옮겨 싼타페, 투싼 등 SUV 상품개발과 마케팅을 거쳐 현대자동차 국내상품팀장을 끝으로 퇴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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