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이 청각을 앞서는 자동차 실내 공간에서, 인포테인먼트의 하위 요소가 되어버린 자동차 오디오는 실체가 없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스피커 몇 개, 버튼 몇 개 그리고 최대한 넉넉한 크기의 인터페이스 디스플레이뿐.
그런 단순함이 누구에게는 고군분투의 요인이 된다.
실내 구조는 점점 복잡해지고 마감 소재가 다양해졌으며 ANC, ASD 등 듣고 잊기에 십상인 기능이 디폴트로 들어가되 딱히 눈으로 평가할 게 없으니 청각에 더 집중한 소비자의 욕구는 끝이 없고, 좋은 소리, 좋은 소리… 최대한 많은 것을 담았지만 정작 생색내기는 어려운 게 자동차 오디오 시스템. 그래서 설계자 고민이 크다.
키를 건네받은 ‘GV80’를 오로지 오디오 시스템 구현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2017년 삼성전자에 귀속된 하만과 현대자동차 제네시스의 협업 작.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현대자동차의 최고급 라인업 제네시스에 하만 렉시콘(Lexicon) 브랜드의 스피커 유닛, 디지털 앰프, 음장 알고리즘 등 설계 및 제작 자원을 결합한 일종의 통합 시스템이다.
물론 단순 브랜드 차용이 아니고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의 현물 자동차를 대상으로, 제네시스 및 하만 개발진이 렉시콘 튠업에 장시간 매달린 결과물. 무형의 음향 공학이 앞장서야 하는 작업이다. 렉시콘 측 과제 범위는 DSP 앰프, 스피커를 대상으로 하고 헤드 유닛에 표현되는 것을 기준으로 FM 튜너 솔루션, 블루투스 솔루션 그리고 그 이상의 것은 현대자동차에서 제공하였다.
■ 무엇이 들어 있을까?
바로 옆에 스피커가 있는 니어-필드(Near Field) 환경에서 짜여진 실내 구조를 해석하고 온갖 반사와 흡수를 통제하며 각기 다른 위치의 승차자 모두를 만족시키는 음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레게 음악에 익숙한 사람, 클래식에 익숙한 사람, 가요나 팝 뮤직에 익숙한 사람 등 콘텐츠의 인지 속성까지 반영해야 하니까 N × N 무한 조합을 제대로 소화하는 지능적 알고리즘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런 알고리즘이 하만 렉시콘의 ‘퀀텀로직 서라운드(QuantumLogic Surround, QLS)’.
작명을 잘했다 싶은 QLS는 수학 공식과 소프트웨어의 힘을 빌려 극미 세상의 양자 에너지를 다루듯 2채널 스테레오 음원에 담긴 각기 다른 부분 음을 추출하고 여러 개 스피커 유닛에 적절히 재배분한다. 그리하면 추출된 보컬 또는 악기의 위치나 음 강도를 달리하는 등 다양한 연출이 가능하다. 더하여, 느긋한 소리 감상에 필요한 저소음 환경을 만들어주는 노면 소음 제거 기술(RANC; Road-Noise Active Noise Control), 위상 반전형 노이즈 제거 기술(ANC; Active Noise Cancelling) 그리고 인위적 소음 제거가 재생 음에 주는 영향을 극소화하는 트루-오디오(True Audio) 보정 기술의 역할이 더해진다.
렉시콘의 음향기술을 가지고 GV80 내부의 구조 해석, 요구되는 사운드 튠업 조건 등을 종합한 다음 대한민국 운전자의 감성에 맞도록 ‘소리 생성 정책’을 조율해 나가는 것이 제네시스와 하만 코리아 개발진 활동의 핵심이었다고 본다.
한편으로 소리 콘텐츠에 대한 인식이 문화에 따라서, 지역마다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글로벌 소리 데이터베이스에, 글로벌 제조 능력을 갖춘 하만과 현대자동차의 연합은 모두에게 유효한 강점이 될 것이다.
■ 생소한 Lexicon?
GV80를 튠업한 렉시콘은 1971년에 설립되었고 녹음 스튜디오 및 공연장 오디오, 자동차 오디오에 특화 역량을 보여주는 전문 브랜드로서 기술 키워드는 Digital Sound Processing이다. 줄여서 DSP. 그게 GV80와 같은 자동차의 복합 공간에 딱 들어맞는 해법이니 마침 걸맞은 조직이 역할을 담당한 것. 어쩌면 렉시콘 개발진이 GV80라는 공간을 DSP로 만지작거릴 수 있는 작은 공연장으로 인식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음장 옵션에 ‘무대 모드’ 메뉴가 있는 것이겠고?
참고로 렉시콘이 속한 하만 인터내셔널(Harman International)은 1953년 시드니 하만과 버나드 카돈이 설립한 Harman-Kardon 오디오 회사에서 출발하였고 오디오 황금기의 Harman-Kardon 빈티지 오디오는 여전히 찾는 이들이 많다. 90년대 이후, 아날로그 오디오의 쇠락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회사와 브랜드가 사라졌음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함은 말 그대로 사업 잘하는 조직이라는 뜻. 자동차 전장 부문 매출이 좋아서였겠지만 오디오도 잘 만들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오디오 부문에서는 JBL, Mark Levinson, AKG 외 이름만 들으면 다 알 수 있는 꽤 많은 브랜드를 아우르고 있다.
■ 가정집 하이파이처럼, 마음껏 음을 평가할 수 있는지?
답은 아니요. 앞서 언급한 대로 자동차 오디오는 가정집 하이파이 시스템이나 A/V 시스템에 비해 너무나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고 달리는 차가 만나는 다양한 변수가 부정형의 교란 인자로 작용하므로 대등한 비교는 처음부터 넌센스. 그럼에도 차이를 최대한 줄이는 게 자동차 오디오 솔루션의 능력이자 가치라고 보면 최대한 격차를 줄였다는 GV80 렉시콘의 음을 느껴보기는 해야겠으니…
몇 가지 즉흥적인 테스트를 진행해보았다.
○ 과부하 반응
블루투스 볼륨 Max 곱하기 시스템 볼륨 Max. 즉, 시스템 과부하를 주었을 때 공간의 반응에 약간 무리가 따른다. 그런데 그것은, 입력 제한을 두지 않는 모든 오디오 시스템에서 생기는 어쩔 수 없는 물리 현상.
Music 출력으로 짐작되는 채널 당 75W 곱하기 14개 채널의 Full Power 그러니까 단순 합산으로 약 1,000W이고 실효 출력으로 가늠하건대 수백 W가 넘을 에너지가 만들어내는 어마어마한 공기 압력과 전파를 생각하면 마치 혼자 압력실에 앉아 있는 꼴이 되는 것. 상황이 너무 과하다. 역시 다중이 쓰는 오디오 시스템이 창문 닫힌 옆 차 노랫소리가 창문 닫힌 내 차 안으로 쉽게 들어올 정도의, 대단히 큰 음량을 취급할 필요는 없다.
○ ‘의자 밑 서브-우퍼’
GV80은 분명 SUV. 승용차처럼 저역 재생에 유리한 트렁크 룸이 없고 적재 공간은 어떻게든 비워 놓아야 하니까 직경 20cm, 약 7인치 서브 우퍼 유닛 두 개를 앞쪽 열 의자 밑에 배치하였다. 덕분에 영화 아바타의 ‘Viperwolves Attact’ 사운드 트랙에서 낮고 깊은 저음이 어울리며 박진감 넘치는 소리를 감상할 수 있었고. Wide 디스플레이가 바로 앞에 있으니 차 안에서 그럴듯하게 영화 한 편 감상할 조건이 갖춰진 셈이다.
영화 감상이라고 하니… 그렇다면 렉시콘 오디오는 5.1채널 이상을 수용하는 것일까? 묻자니 “DTS-CD, DTS-V 등 멀티 채널을 지원합니다”라는 답변이. DTS 로고가 붙은 영화 소스가 있어야겠다.
○ FM 방송
디지털 음원과 블루투스 무선의 조합은 그럴듯한 것으로 포장되기 일수라고 생각하여 가장 불안정한 소스인 FM을 선택하였다. 사용된 튜너 Chip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음은 대체로 무난하다.
○ 이 화창한 봄날에, “봄날은 간다”
오래전 스피커 제작 중 테스트용으로 수없이 들었던 곡. APT-X HD를 지원하는 안드로이드 핸드폰이 현대자동차가 선정한 BT 모듈에 최선의 상태로 붙었을 것인데… 적당한 볼륨, 옵션 기본으로 기억과 청감을 비교해보았다.
확실히 개방된 거실 공간 내 파-필드(Far Field) 청취와 복잡다단한 공간 안에서, 스피커 유닛에 근접해서, 그것도 중심선에서 이탈한 조건에서 듣는 것은 다르다. 말로 다 묘사할 수는 없지만 운전석기준으로 약간은 톤이 다르고 음역 배분이 다르고. 다채널 디지털 앰프 등 하드웨어적 변수보다 타켓(Target) 즉, ‘소리의 조성’에 관한 기술적 정책 때문이거나 가정집 오디오에 익숙한 청감 때문이려니 한다.
변화무쌍한 요인이 개입되고 기준점이 없는 자동차 사운드 평가는 참 어렵다. 그 점 충분히 양해되는 조건에서 전체적인 느낌은?
시동을 건 정차 상태에서, 창문 올리고, 모든 옵션 디폴트, 중간 볼륨 이하 조건에서 소리가 풍성하고 편안한 편이다. “편안하다”는 표현의 등치 문구는 ‘가족 모두를 위한 사운드’ 정도. 앞선 과부하 조건을 포함하여 대체로 어떤 외산 브랜드, 어떤 모델보다는 좋거나 무난한 편이다. 물론 다른 상황의, 다른 느낌도 있었는데 뒷자리였다면 달랐을 수도 있고 어쩌면 블루투스 연결 품질이나 3M 선팅 필름의 음 반사도가 0.01%쯤 영향을 주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
주행 중 음 품질은, 아무래도 운전에 집중하자니 조용해서 잘 들린다는 것 빼고는 특기할 게 없다.
소리 배경이 차분했던 것은 도어 웨더 스트립의 강력한 밀착 효과, 차체 방음 수준 그리고 ANC, RANC, True Audio 등의 여하한 조합이 물 밑에서 작용한 결과이겠다. 스포츠 모드에서 한껏 강조된 엔진음은 기본 RPM 상승이 만들어내는, 3.5리터 380PS, 54.0kg·m 트윈 터보 엔진에 어울리는 저돌적이거나 으르렁거리는 물리적 착색. 기대했던 ASD 사운드는 가속 패덜의 상태, RMP, 현재 속도 등 주행 변수를 반영하여 따로 생성된다고 한다.
■ 자동차 오디오의 가치라는 것
“오디오 회로는 단순할수록 좋다”, “청자가 상황을 직접 통제하지 못하는 소리는 못마땅하다”는 마인드와 아날로그 우선 취향에서 비롯된 D-Class 앰프에 대한 은근한 거부감을 가진 자가 디지털과 소프트웨어에 집중하는 GV80 렉시콘 오디오 시스템을 바라보면 저 멀리에 있는, 관심 밖의 시스템이 된다.
그런데 그런 고집스러운 태도로는 복합 구조 자동차 안에서 절대로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없다. Pure Sound 운운을 멀리 미뤄두면 확실히 소리를 다루는 방법이 아날로그적 방법론과는 다른, 알고리즘과 소프트웨어 중심의 렉시콘이 소리를 잘 들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맞고…
롤스 로이스 팬텀(Rolls-Royce Phantom)에도 탑재된 고급 오디오 브랜드로서의 렉시콘, 프로 오디도 세상에서 입체 음 튜닝에 능한 렉시콘은 도어 안쪽의, 테두리가 반짝 빛나는 크고 작은 세 개의 동그라미 즉, 트위터와 미드와 우퍼로써 존재감을 표현하고 있다. 숨어 있거나 있는 둥 마는 둥 하기 십상인 자동차 오디오의 틀에서 그나마 은밀하게 디자인적 강조점을 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Lexicon’ 문자열이 GV80이나 따로 옵션이 정해진 타 모델의 구매로 이어지는 주된 판단 변수가 될 수는 없겠지만 호감도를 끌어당기는 견인차 구실은 할 수 있다고 판단되고 종종 소리 듣기를 좋아하는 운전자에게 기본형 차량 가격의 2.5% 수준, 백만 원대 중반 예산은 그리 과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게 그러니까 너무 몰입하지 않는 수준으로 가정집 A/V 시스템을 사는 정도의 부담감이라고 본다면.
박태수 <자동차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