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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형의 하이빔] 11. 그놈의 옵션, 어찌하오리까

“골프담당자는 얼마나 좋을까?”
언젠가 차종 담당자가 신차의 모델 운영안을 작성하던 중 한숨을 쉬면서 하는 이야기였다. 폭스바겐에서 수입하는 골프는 엔진과 외장 컬러만 선택하면 된단다. 내가 들어도 부러운 이야기였다. (최근의 골프는 아니지만) 자동차 상품기획 업무를 오랫동안 해오면서도 가장 궁금하고 시험해보고 싶은 일이었지만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이기도 했다.

2000년 트라제가 처음 나왔을 때 너무나 많은 옵션 때문에 주요 옵션별로 묶어 패키지 형태로 엮었음에도 가격표가 대하드라마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자가 (희귀한) 개별 옵션을 단품별로 하나씩 선택하지 못 하게 했다는 민원을 이유로 회사가 감사원의 감사까지 받는 희극(?)까지 연출했었다.

우리나라가 그렇게나 소비자를 소중히 생각하는 나라구나 하고 감동도 했지만 반대로 자동차 회사가 주민센터도 아니고 소비자의 의견을 하나하나 모두 반영해야 하는 건지 의아하기도 했다. 결국 소비자가 원하는 옵션을 적용한 희귀한 차를 생산 한 것으로 기억한다. 단 1대! 운전석 에어백은 없고 조수석에만 에어백을 적용했다. 자기는 죽어도 되고 아내는 살아야 한다는….

폭스바겐도 실질적으로 옵션 운영을 그렇게 단순하게 하지는 않는다. 단지 수입 판매 회사에서 그런 사양 구성으로 폭스바겐 본사에 주문해서 들여왔기 때문일 뿐이다.

자동차는 무수한 옵션을 하나하나 조합해서 차를 만들 수 있게 되어있다. 그것을 SPEC(SPECIFICATION)이라고 부른다.

엔진이 2가지, 옵션이 3가지, 외장 컬러가 3가지라면 엔진/옵션/컬러로 구성할 수 있는 스펙의 가짓수는 2☓3☓3=18가지가 된다. 예를 들어 신형 투싼의 경우 엔진은 제외하고 옵션이 20가지 정도 된다고 보고 변속기 2가지, 외장 컬러 6가지 정도라고 하자.
SPEC의 수는 20☓2☓6=240가지가 된다. 엔진을 3종으로 하면 720가지가 된다. 이 계산은 단순히 가격표에 표기되는 기준으로만 계산해 본 것이고 실질적으로는 3,000가지 정도는 될 것이다. (생산공장 기준으로 좀 더 세분화하면)

물론 이 720가지의 차를 동시에 모두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중 소비자들이 많이 선택하는 스펙은 100가지도 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스펙은 1년에 1대도 만들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메이커 내에는 가격표가 단순해야 좋아하는 사람과 복잡해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설계, 구매, 생산, 원가(재정) 부문 등의 사람들은 가격표가 단순할수록 좋다. 업무가 줄어서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비용이 절감되기 때문이다.
가격표가 두툼해야 좋아하는 사람은 단 하나, 영업 부문이다.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는 모델이 다양하니 얼마나 판매에 도움이 되겠는가? 팔기 좋게 모델을 다양하게 만들어놨으니 이젠 팔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상품팀장을 하던 2000년 중반, 전국 400개가 넘는 지점의 카마스터 중에서 판매실적과 자동차에 관한 관심, 참여도 등을 고려해 10여 명을 추천받아 매월 초 본사에서 상품간담회를 진행했다. 매월 여러 가지 안건을 가지고 열띤 토론을 하고 현장의 의견을 수렴했는데 현장의 요구 사항 중 빈번하게 나오는 항목이 “가격표 단순화” 였다.

무슨 소리인지?

소비자들이 원하는 사양을 자유롭게 선택해서 가장 자기에게 적합한 차를 만들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한 장본인이 카마스터인데 이제 와서 무슨 소리란 말인가? 간담회에 참석한 카마스터들은 지금 가격표의 절반으로, 결국 스펙을 절반으로 줄여도 판매에는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어떤 과격한(?) 카마스터는 폭스바겐 골프처럼 해도 전혀 문제없다고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고객들은 자신이 가격표를 앞에 놓고 하나하나 골라가면서 차를 꾸미고 싶어 할 수도 있지만 차라리 자신이 꼭 필요로 하는 엔진, 사양, 가격대 등을 제시해주면 카마스터가 가장 적당한 모델을 추천해주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카마스터가 추천하는 모델이 과연 나의 카라이프나 취향에 적합한지가 불확실 한건데 그 부분을 카마스터가 그야말로 스토리텔링을 통해 확신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려고 주차장에 갔는데 키를 안 가지고 왔다. 하지만 나의 스마트폰이 디지털 키로 변해 시동 걸고 회사로…. 거래처에 갔다가 주차장을 나오는데 주차비는 내비게이션의 카페이 기능을 이용해 지불하고…. 아들놈을 학원에서 데리고 집에 와서 내려주려고 하는데 안전하차 경고가 울려 뒤에 오는 차에 추돌 모면….” 이렇게 말이다.

여러 번의 간담회와 지점대상 설문조사 등을 거쳐 단계적으로 현재의 스펙을 100%에서 70~80%, 50~60%까지 줄여나가는 가격표 단순화(옵션 단순화) 계획을 수립, 차기 이벤트부터 시행하려고 했으나 엄청난 반대와 공갈, 협박에 부딪히게 되었다.

트라제때 감사받은 이야기부터, 만일 옵션을 줄여서 기본 가격이 올라가고 소비자가 원하는 스펙이 안나와서 판매가 줄면 책임질거냐 하는 협박까지 저항은 엄청났고 결재를 해줘야 할 경영층에서도 지금도 잘 팔리고 있는데 왜 긁어 부스럼 만드느냐 하는 시선으로 반신반의했다.

반대로 생산, 구매, 연구소에서는 그야말로 고사라도 지내는 심정으로 스펙줄이기 프로젝트가 무사히 진행되기를 기대하고 있었고.

다음은 옵션가격, 옵션 운영으로 소비자 주머니 털기(?), 옵션질 이야기다. 소비자들이 자동차 제작사의 옵션운영(모델운영)에 대해 비난을 하는 내용은 주로 다음과 같은 경우다.

가장 많은 불만이 고객이 선택하고자 하는 옵션을 포함해 불필요한 옵션까지 묶는 그야말로 “옵션질”이라고 하는 것이다. 메이커 입장에서는 소비자의 복잡한 옵션 선택을 도와(?) 쉽게 자기가 선택한 모델의 옵션 추가를 결정하도록 하는 것인데 소비자 입장에서는 왜 거기에 필요 없는 옵션까지 끼워 넣느냐는 것이다. 공짜로 끼워준다면 몰라도 당연히 옵션 패키지의 가격이 올라가니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 또 어떤 옵션은 그야말로 고가 모델에서만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저가 모델을 선택한 소비자에게는 그림의 떡이 될 수밖에 없는 경우다.

특히 고가 모델에서만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승객의 안전에 관련된 사양이라면 바야흐로 유튜브용 먹잇감이 될 수 있다. (살펴보면 그런 경우도 있기는 하다.)

“돈 있는 사람은 오래 살고 돈 없는 사람은 일찍 죽으라는 이야기냐” 하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요즘 같으면 청와대 청원감이 될 수도 있겠다. 최근 각 제작사 가격표를 훑어보면 이제는 소비자가 보기에도 황당한 사양끼리 옵션을 묶어서 내놓는 경우는 많지 않은 듯하다. (장담은 못 한다!)

기술발전으로 여러 옵션의 가격이 많이 낮아지다 보니 설사 여러 옵션을 묶는다 해도 가격상승이 크지 않아서 소비자 입장에서는 공짜로 끼워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센서 몇 개에 카메라 하나 달아놓고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이리저리 이용하면서 무슨 전문용어는 그리도 많이 사용하는지. (FCA, LKA, BCA….) 또 옵션의 원가들이 많이 내려가니 아예 기본사양으로 적용한다 해도 가격 변동이 크지 않은 경우도 많다. 가장 바람직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결국 소비자들의 눈이 맞다.
가격표를 들여다보다 보면 메이커의 의도가 보인다. 결국 메이커가 팔고자 하는 핵심 모델이 보인다. 그 모델이 제작사가 많이 팔고 싶어하는 모델이며 그 차종에서 가성비가 가장 좋은 차다.

이제는 이야기 할 수 있다.
제작사에서 모델이 많아지고 옵션이 복잡하게 얽히는 원인은 그놈의 판매촉진 때문이다. (실제 판매가 늘어나기는커녕 소비자는 복잡하고 악성 재고만 쌓였지만) 판매가 안 되면 경영층에서는 볶아대기 시작한다. 마케팅은 시달리기 시작한다. 지점의 카마스터도 차를 못 팔면 핑계를 댈 희생양이 필요하다.

결국 그놈의 근거 없는 “소비자의 다양한 니즈” 라는 마케팅 용어가 끌려 나온다.
몇 년 전 보고했던 판촉안도 날짜와 글씨체 바꿔서 새로운 기획안으로 등장하고.
정말 소비자가 원했나? 다급하다 보니 뭐라도 해보느라 돈 안 드는 모델 늘리기와 옵션을 복잡하게 만들지만 돈 이 안 드는 게 아니다. 보이지 않는 엄청난 비용이 발생하는 건 왜 모르는지.

차라리 그 비용으로 차값을 깎아주는 게 훨씬 낫다고 장담한다.

유재형 <자동차 칼럼니스트>

필자 유재형은 1985년 현대자동차에 입사, 중대형 승용차 상품기획을 맡았으며 현대모비스 전신인 현대정공에서 갤로퍼, 싼타모 등의 개발에 참여했다. 이후 현대자동차로 옮겨 싼타페, 투싼 등 SUV 상품개발과 마케팅을 거쳐 현대자동차 국내상품팀장을 끝으로 퇴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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