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9월, 앵커리지를 거쳐 서울로 오던 대한항공 KE007편이 캄차카반도 인근 소련영공에서 미그기의 미사일 공격으로 격추되어 탑승자 269명이 전원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다.
비행기가 광활한 하늘 위에서 길 물어볼 복덕방도 없을 테니 자체적으로 현재 위치를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이고, 그 당시에는 GPS(위성항법장치)를 활용한 방식이 아닌 관성항법장치(INS)로 위치를 파악했다. 이 관성 항법장치의 오작동으로 KE007기가 원래의 경로보다 훨씬 북쪽 캄차카반도 부근 소련영공으로 들어갔고 미국과 냉전 중이던 소련은 적기로 오인, 전투기를 출격시켜 미사일을 발사해 269명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참혹한 사건이었다. (그 당시 소련의 주장은 그랬지만 비무장 민항기 격추와 관련한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관성항법장치가 정말로 오작동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이 KE007기 격추사건을 계기로 당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이 군사용으로 개발해 활용하던 GPS를 민간에 개방하기로 했다.
미국이 GPS를 민간에 개방했다고 해서 당장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개발된 건 아니다. 처음으로 GPS를 기반으로 한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장착한 것은 일본의 마쓰다 자동차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는 1993년 현대전자가 자동차용 항법장치(내비게이션)를 미국, 일본에 이어서 세계에서 3번째로 개발했다. 개발했다고 당장 제품이 나온 건 아니다. 1997년 현대오토넷이 차량용 매립형 내비게이션 제품을 출시함으로써 현대차의 내비게이션 역사는 시작된다.
현대는 1997년 7월, 그 당시 국내 최고가 대형 모델인 1998년형 다이너스티에 적용했고 이어서 기아의 엔터프라이즈, 현대 에쿠스, 쌍용자동차의 체어맨 등 고급 대형차에 순차적으로 적용됐다.
이렇게 차량용 내비게이션이 국내 차량에도 적용되기 시작했지만, 성능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구형 2D 지도가 사용된 현대오토넷의 제품은 국내 최초의 내비게이션인 만큼 획기적이었지만 정확성과 품질이 떨어져 큰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국내 최초로 적용한 다이너스티도 그 당시 국내 승용차 최고가로 5,000만 원 가까이 되는 퍼스트 클래스 모델에 그것도 ‘옵션’으로 적용했으니 관련 일반 소비자들이 내비게이션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기나 했을까.
당시 민간용 GPS는 오차범위가 300피트로 거의 100m 수준이었다. 미국이 GPS를 민간에 개방하면서 군사 공격을 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의로 신호를 왜곡해 오차범위를 크게 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GPS의 선별적 활용(SA, Selective Availability)이라 말한다. 쉽게 말해 민간에서도 공짜로 사용하게 해주는 대신 정확도는 좀 떨어지더라도 알아서 쓰라는 이야기였다. 공짠데 불만이 있어도 참고 써야지 어쩌겠나.
2000년, 클린턴 대통령은 이런 선별적 활용(SA)을 종식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GPS를 전 세계 일반인이나 상업적 이용자들이 좀 더 실질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위한 배려(?) 였다. 인류애적인 배려도 있었겠지만 GPS를 활용한 민간경제의 획기적 발전을 목표로 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실질적으로 GPS가 민간에 개방된 건 이 시점부터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레이건 대통령은 생색만 냈고 클린턴의 결정으로 민간이 본격적인 내비게이션 시대를 열 수 있었다는 것. 클린턴은 1996년에 이를 결정하고 실행은 2000년에 이뤄졌다. 이 조치로 미국의 SA제한은 2006년까지 점진적으로 완화되어 GPS 정확도는 40피트 범위로 10m 좀 넘는 수준까지 개선됐다.
클린턴의 축복 같은 조치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은 사건도 있었다. 바로 2001년 9월 11일의 911테러다. 그러나 다행히도 미국 정부는 다시 SA 규제를 도입할 계획은 없다고 발표했다.
1997년 현대차 최초로 적용된 다이너스티의 내비게이션은 SA 규제 완화 이전으로 GPS 오차가 100m인 상황이었으니 오죽했겠는가. 그래서 그랬는지 다이너스티 이후에는 모두 2000년 이후에 내비게이션이 적용된다. 기아 엔터프라이즈는 2000년, 쌍용 체어맨은 2003년에 내비게이션을 장착하고 등장했다. 어쩌면 1997년 최초로 적용된 다이너스티의 내비게이션은 시대를 너무 앞서 나온 풍운아였다는 생각이 든다.
1999년 10월, 현대자동차가 유럽형 MPV로 개발한 트라제 XG가 런칭했다. 에쿠스를 능가하는 몸에 좋다는(?) 사양이란 사양은 있는 대로 다 붙였다. 국산차 최초로 음성경고 안내 장치를 적용해 ‘말하는 자동차’라고 홍보하기도 하고 비가 오면 자동으로 닦아주는 와이퍼(레인센싱 와이퍼)에 타이어 공기압을 자동으로 알려주는 TPMS(Tire Pressure Monitoring System), 후방주차는 물론 전방주차센서까지 적용했다.
여기에 첨단 내비게이션이 빠질 수야 있겠는가. 그러나 적용을 위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논란이 있었다. 구매팀, 원가팀 및 관련 설계 등 연관 부문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한편은 “일 년에 내비를 몇 대나 판매할 것인가?” 하고 묻고 다른 한편에서는 “가격은 얼마까지 해줄 수 있는가?”하고 대답하니 끝도 없는 논쟁뿐이었다.
결국 구매팀과 원가 팀에서 손해 보고 판다는 듯이 제시한 가격이 300만 원대. 기가 막힐 일이었다. 디젤 기준으로 9인승 기본형이 1,900만 원대, 최고급 형이 2,400만 원대인데 내비 옵션가가 300만 원? 결국 옥신각신하다가 최고급 모델에만 옵션으로 선택할 수 있게 가격표를 구성했다. 옵션 가격은 270만 원. (몇 대가 팔렸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자동차 제작사의 순정 내비게이션은 차를 구입하는 소비자에게는 그 활용도(정확도)나 가격(거의 300만 원대) 측면에서 볼 때 그야말로 돈이 많거나 신기술이라면 맨발로 쫓아다니는 마니아가 아니면 쉽게 선택할 수 없었다. 중형차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그림의 떡이었다.
제작사의 순정 매립형 내비게이션을 제대로 적용해볼 두 번째 기회는 2004년 5세대 NF 쏘나타를 출시하면서 다시 왔다. NF 쏘나타는 자체 플랫폼 개발기술이 축적된 성과가 본격적으로 적용된 첫 번째 쏘나타로 시리우스 엔진을 버리고 자체 개발한 세타엔진을 처음 적용했다.
NF 쏘나타의 내비게이션 가격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다른 차종들의 옵션 가격 방향도 결정될 수 있는 중요한 차종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제작자 편의주의라고 할까, 고객보다는 만드는 사람 위주의 억지 철학으로 또 한 번 순정 내비가 자리를 잡을 기회는 다음을 기약하게 된다. 여기에는 현대차가 2003년부터 시작한 텔레매틱스 서비스인 모젠(MTS)도 한몫을 한다.
NF 쏘나타 2.0을 기준으로 상급 모델인 엘레강스 스페셜의 슈퍼급 이상에 AV 시스템이 포함된 ‘DVD 내비게이션’이라는 이름으로 옵션 가격이 356만 원이었다. 거기에 모젠 옵션은 234만 원이었다. 차 가격이 2,200만 원대인데 내비가 356만 원이었으니 지금 보면 어이없을 수준이다. 모젠도 길 안내는 했다. TBT(Turn By Turn) 방식이었다. 요즘 차에서 계기판에 내비의 방향/거리 안내만 간략하게 띄워주는 방식이었다.
모젠과 내비는 같이 적용하지 못했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 소비자들뿐만 아니라 영업 현장에서도 혼란스러워했다. 내비를 추천해야 하는지 모젠을 추천해야 하는지. 물론 가격이 엄청나니 물어보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당시 에쿠스에 적용된 내비게이션 옵션 가격은 AV 포함 여부에 따라 모델별로 170만 원~540만 원까지 다양했다. 그래도 에쿠스는 차 가격이 4000~6,000만 원에 리무진은 7,000만 원을 넘는 국내 최고가였으니 그나마 나았다.
또 하나 말 못 할 사연이 있었다. 현대차가 야심적으로 시작한 텔레매틱스 사업인 ‘모젠’에 더 힘을 몰아준 것. 모젠을 택하면 내비는 포기해야 했다. 게다가 더 낮은 모델에서는 모젠을 선택할 수 있었고 내비를 선택하려면 더 높은 모델을 선택해야 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모젠은 경영층의 관심이 큰 시스템이다 보니 심지어는 영업 현장의 카마스터에게 모젠을 판매하면 포상까지 했다.
말도 안 되는 높은 가격, 집안 식구간의 충돌. 이로 인해 NF 쏘나타에서도 내비게이션의 본격 보급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메이커에서의 내비게이션 개발이 지지부진하는 사이 애프터마켓 시장에서 수많은 내비게이션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내비게이션 전용 단말기가 2004년에 출시되면서 국내도 바야흐로 내비게이션의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귀에 익숙한 팅크웨어에서 제작한 “아이나비”와 맵피 유나이티드가 제작한 “맵피”가 애프터 마켓용 내비게이션 시장의 양대 산맥을 이뤘다. 그 당시 중고 흑백 PDA에 불법 다운로드한 맵피 맵을 깔고 용산에서 구입한 GPS 안테나를 내 차에 달고 다니던 기억이 난다. 마눌님 모시고 강원도의 유명 수목원을 찾아갔는데 분명 다 왔다고 PDA에 내 위치가 나오는데 수목원은 없고, 동네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산 너머란다. 마눌님 얼굴 보기가 두려웠던 기억이 난다.
가격은 결국 시장이 정해준다. NF 쏘나타가 황당한 내비게이션 가격 운영으로 존재의 의미가 없을 당시, 같은 해에 탄생한 아이나비나 맵피, 그리고 그 이후에 나온 많은 애프터 마켓용 내비게이션의 약진으로 그야말로 내비게이션 전성시대가 온다.
메이커에서 나온 순정(?) 내비를 장착한 차가 오히려 희귀동물로 취급받고 차량 출고 후에 카마스터가 서비스로 장착해주는 내비게이션은 30만 원이면 충분했다. (업데이트도 수시로 해주고 제작사와는 비교가 안 되었다) 심지어 제작사와 같이 센터페시아의 오디오 자리에 장착하는 매립형 내비도 70~80만 원이면 가능한 시대가 온다.
2007년 11월, NF 쏘나타 페이스리프트 모델인 “쏘나타 트랜스폼”이 출시되었다. 여러 부분이 변경되었지만 특히 혹평을 받았던 실내 디자인 개선이 컸다. NF가 원가 절감했던 것 다 토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판매가격표에서 내비게이션을 한번 찾아보면 전략 모델인 트랜스폼 모델에 적용되는 내비가 138만 원이다. 그것도 내비만이 아니라 억지로 외장형 앰프에 서브우퍼, USB/i-POD 단자까지 끼워 넣은 가격이다. 엘레강스 모델로 올라가니 순수 내비의 가격이 나온다. 107만 원, intelligent DMB Navigation의 옵션 가격이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지 않은가?
초기 소비자가 경험할 기회를 많이 주기 위해 전시차, 시승차를 내비가 적용된 차 위주로 만들었다. 초기 생산계획에도 내비 적용된 모델을 많이 반영했다. 현대차가 내비를 많이 팔려고 내비 없는 차는 생산을 안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NF 트랜스폼이 나오고 나니 아이나비에서도 50만 원이 넘는 고급형 모델을 내놓기도 했다.
순정 내비게이션 시대는 그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유재형 <자동차 칼럼니스트>
필자 유재형은 1985년 현대자동차에 입사, 중대형 승용차 상품기획을 맡았으며 현대모비스 전신인 현대정공에서 갤로퍼, 싼타모 등의 개발에 참여했다. 이후 현대자동차로 옮겨 싼타페, 투싼 등 SUV 상품개발과 마케팅을 거쳐 현대자동차 국내상품팀장을 끝으로 퇴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