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대 인터넷 서비스 회사의 여성 CEO 인터뷰를 언론을 통해 읽었는데 재미있는 내용이 있었다.
그녀는 창업하기 전에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에서 잘나가는 컨설턴트로 유수한 기업에 컨설팅하면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에 뛰어들었던 그 CEO는 아이러니하게도 회사경영을 하는 데 컨설팅이 쓸모없다는 무용론을 주장했다.
현대자동차가 그동안 해외의 여러 지역의 시장을 대상으로 한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컨설팅을 받아왔겠는가.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불하고 받은 컨설팅 결과 중에 단골로 들어있는 내용이 있다.
북미 시장에는 픽업이 반드시 필요하고 유럽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오픈카가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방대한 소비자 조사 결과와 첨단 분석기법을 적용해 복잡한 용어를 꽉 채운 보고서에는 어김없이 이런 내용이 들어있었다.
“소비자의 제품 선택폭을 넓히고”, “경쟁사와의 상품 라인업에서 경쟁력을 강화하고”, “브랜드의 이미지를 강화해 회사 및 제품에 대한 선호도를 높이고”, 그래서 결국은 “판매를 증대시키고”하는 문구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다른 회사에는 이 물건 있는데 우리는 없으니까 우리도 만들어야 소비자들이 우리 가게에 들렀다가 그냥 안 가고 뭐라도 하나 살 거 아니냐, 뭐 이런 내용이겠다.
서두의 일본 여성 CEO의 컨설팅 무용론도 (픽업이든 오픈카든 컨설턴트 말씀이 옳겠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최종 결정을 해야만 하는 메이커 CEO의 중압감을 대신 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인 듯하다.
2020년 초, 현대차 북미 담당 사장이 2021년 후반부터 앨라배마 공장에서 픽업인 싼타크루즈를 연간 약 4만 대 생산해서 현대차 딜러점에서 판매한다고 발표했다. 싼타크루즈라는 이름 그대로 발매될는지는 모르지만 2015년 디트로이트 오토 쇼에 콘셉트 모델로 내놓은 HCD-15를 베이스로 한다는데 이 차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온통 카더라 자료들이 많이 올라오고 있으니 참고하면 될듯하고.
(플랫폼이 싼타페라느니, 새로 나오는 투싼 NX-4의 플랫폼을 썼다느니, 프레임이라니 세미프레임이라느니 등등 카더라 정보가 넘쳐난다.)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현대차 내에서 픽업과 오픈카에 대한 검토와 시도는 계속 있었다.
픽업의 경우는,
1992년 현대정공이 만든 갤로퍼가 출시되어 시장에 안착을 하고 난 뒤 정몽구 회장의 관심사는 수출이었다. 당시 갤로퍼 수출 담당 중역이 중남미에서 무수히 굴러다니는 픽업을 보고 우리도 이런걸 해야 한다고 정 회장에게 보고를 했고 정 회장은 갤로퍼를 가지고 픽업을 만들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를 했다. (미쓰비시가 어떻게 나올는지 그런 건 나중에 고민하고)
연구소에는 당장 갤로퍼를 가지고 회장님 품평을 할 품평차를 만들라고 지시하고.
연구소에서는 갤로퍼 1열만 남기고 2열부터 잘라내 적재함을 만들어 올린 품평차를 만들었고 사진을 찍어 중남미의 갤로퍼에 관심이 있는 딜러들에게 보내 의견을 들었다. 결론적으로는 상품성도 상품성이지만 중남미 현지에 생산 공장을 가지고 있는 일본, 미국의 자동차 메이커와 가격 경쟁력에서도 한참 뒤처진 상황이라 달랑 갤로퍼 픽업 사진 한 장 남기고 프로젝트는 종료되었다.
미국 딜러에게 볶이다 보니 픽업을 만들기는 해야겠지만 차를 만드는 것보다 더 큰 장벽은 미국의 관세였다. (얼마 전 그동안 잘해놓은 한미 FTA를 트럼프가 뒤집어 놓은 바람에 미국의 수입 픽업에 대한 25% 관세는 20년 더 연장되어 부과되게 되었다) 아무리 차를 잘 만들어도 한국에서 배 타고 미국에 도착해서 거기에 더해 관세를 25%나 두들겨 맞고 무슨 수로 가격 경쟁력이 있겠는가.
픽업 시장이라는 게 북미 시장이 중심인데 결국 그 시장에서 픽업을 팔려면 좋은 차를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산을 현지에서 해야만 가격 경쟁력을 그나마 확보할 수 있다. 제품이 팔리고 안 팔리고는 그다음 얘기다.
그렇다고 픽업을 생산하기 위해 별도의 공장을 북미에 건설한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고. (자동차 공장이라는 게 최소 5만 대 규모는 되어야 하는데 그 당시 승용차도 변변하게 못 팔고 있던 시절인데 생소한 픽업을 무슨 수로 5만 대씩 판매한다는 말인가? 토요타 같은 메이커도 픽업 시장에서 나름 노릇을 한 지는 얼마 안 되던 시절인데)
생산이라는 측면을 중점으로 검토하다 보니 꼭 우리가 모든 걸 다 만들어서 우리 공장에서 조립해야만 팔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픽업이라는 차가 승용차처럼 그렇게 정밀하게 설계된 모노코크 타입도 아니고 주로 프레임(차대)에 엔진, 변속기를 얹은 하체에 차체를 얹는 방식(이 방식을 ROLLING STOCK이라고 하기도 했다)으로 만들어, 당시 미국 픽업이나 미니밴에서 흔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일명 배지 엔지니어링(BADGE ENGINEERING) 방식을 적용한다면 현대의 아이덴티티고 뭐고 제쳐두고 일단 딜러가 요구하는 픽업을 만들어서 공급할 수는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오랜 자동차 산업역사를 가진 미국에는 디트로이트를 중심으로 엔진과 변속기를 공급하는 회사도, 프레임을 만들어 줄 회사도, 차체를 디자인하고 금형을 만들어줄 회사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져다 조립을 해줄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가장 핵심은 과연 우리가 그렇게 해서 몇 대나 팔 수 있는지였다.
아무리 여기저기서 부품을 가져다 조립을 위탁해서 엠블럼만 부착해 판매를 한다 해도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고 또 그렇게 생산 한다 해도 얼마나 판매를 할 수 있을는지는 그야말로 막막한 안개 속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도 BIG-3의 텃밭인 픽업 시장에서 말이다.)
결국 이것도 보고서만 잔뜩 남기고 흐지부지되었다.
2000년 초 갤로퍼 끝물에는 자동차 형식승인이 좀 더 완화되는 등 여건 개선으로 국내에서도 픽업형 차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되어 쌍용자동차는 무쏘를 가지고 픽업(무쏘 스포츠)을 개발하고 있었고 현대도 갤로퍼 숏바디 밴을 가지고 밴의 화물칸을 적재함으로 변경하는 방식으로 픽업을 개발하려 했으나 결국은 상품성이 무쏘 픽업에 비해 열악한 등 시장에 내놓을 만한 상품이 못 된다고 판단하여 이 계획도 계획으로 끝나게 된다.
오픈카의 경우는,
픽업의 경우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개발가능성이 희박한 차다. 픽업이야 여러 난관이 있다 하더라도 북미 시장이라는 거대한 물량이 있으니 대박 꿈이라도 꿔볼 수 있다고 하지만 오픈카라는 차는 그야말로 뭐하나 긍정적인 면을 찾아보기 어려운 차종이다.
자동차 메이커가 신차를 개발할 때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해서 얼마나 많은 차를 팔 수 있을 것인지가 가장 큰 고려사항이다. 적은 투자로 많은 차를 판매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가능한 한 시장이 커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적정수준의 판매가 가능한 차를 개발하는 것이 당연지사다. 하지만 오픈카(컨버터블이라는 명칭이 맞겠다)는 어느 것 하나 충족시켜주는 부분이 없는 차다.
차를 개발하는 투자비는 많이 들면서, 판매량은 그야말로 한숨이 나올 정도로 작다. 그래서 컨버터블은 한번 개발하고 나면 사골 우려먹듯이 모델개선이나 변경 없이 긴 세월을 판매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높은 브랜드 지명도와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몇몇 메이커를 제외하고는 더욱 컨버터블 시장 진입을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유수한 컨설팅 회사에서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하고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투자로 보고 컨버터블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한들 어느 메이커의 CEO가 덜컥 결단을 내리겠나.
현대차도 비록 단순 검토에 그쳤지만, 신차종 특히 투스카니나 제네시스 쿠페 등 스포츠 감성의 차를 개발할 때는 단골로 컨버터블을 함께 검토했다. 2009년 유럽 시장 공략을 위해 건설한 체코공장에서 유럽전략형 해치백인 i30(프로젝트명 FD)의 컨버터블 모델을 생산하려고 검토를 하기도 했다.
결국 유럽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현대자동차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기 위한 미끼(?) 차종, 마케팅 용어로 SHOW ROOM TRAFFIC(매장 방문 빈도)을 높이기 위한 목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야말로 프로젝트로 끝나고 말았다.
또, 2011년 출시된 준중형 스포츠 쿠페 벨로스터(1세대 프로젝트명 FS)를 개발할 당시에도 당연히 컨버터블을 검토했다. 유럽의 컨버터블 전문 업체에 검토 용역을 줘 구체적인 생산방안까지 논의하는 단계까지 갔지만 결국 없었던 일로 마무리했다. 이때 최고 경영층의 재가 없이 컨버터블을 추진했다는 이유로 관련 직원들이 문책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현대자동차의 현재의 시장에서의 위치나 투자 여력으로 볼 때는 어쩌면 이제는 황당한 이야기가 아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이제는 전기차 등 또 다른 대규모 투자가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그렇게 여유 있는 상황도 아닐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2021년 후반에 출시한다는 싼타크루즈 픽업도 그렇다.
어떤 기사를 보면 북미 시장의 50%가 픽업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지만, 그래서 지금은 어렵더라도 장기적인 안목으로(이 말이 참 어려운 말이다.) 픽업 시장에 첫발을 내딛는 거라고 이야기하면 참 아름답고 합리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북미 픽업 시장이 세상하고는 동떨어진 곳처럼 대형 픽업이 오히려 더욱 증가하고 고급화되어가고 있다. 또 배출가스 규제 때문에 남들은 다운사이징이니 뭐니 하면서 배기량을 줄여나가는 마당에 오히려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것인지 더 큰 배기량의 모델을 추가하기도 하는 이상한 시장이다. 아이러니다.
대형 픽업이 질주하는 북미 시장에 도심형 크로스오버 트럭 또는 도심형 콤팩트 픽업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되는 싼타크루즈의 운명이 어찌 될는지. 이왕 만든다니 건투를 빌어본다.
유재형 <자동차 칼럼니스트>
필자 유재형은 1985년 현대자동차에 입사, 중대형 승용차 상품기획을 맡았으며 현대모비스 전신인 현대정공에서 갤로퍼, 싼타모 등의 개발에 참여했다. 이후 현대자동차로 옮겨 싼타페, 투싼 등 SUV 상품개발과 마케팅을 거쳐 현대자동차 국내상품팀장을 끝으로 퇴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