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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틀리 100년을 담은 벤테이가 V8

브리티시 럭셔리 벤틀리의 첫 SUV 벤테이가를 만났다. 벤틀리는 롤스로이스와 더불어 영국을 대표하는 럭셔리 브랜드다. 벤테이가는 유라시아 대륙 북부 지역의 침엽수림 타이가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시승차는 벤테이가 V8. 원래는 608마력짜리 6.0 W12 엔진을 사용하지만, 2019년 벤틀리 100주년을 맞아 V8 엔진을 얹은 기념 모델을 출시했다. 굳이 따지자면 보급형인 셈이다. 550마력짜리 보급형 벤테이가 V8에 올랐다.

윙 엠블럼을 금장으로 장식했고 좌우로 1919와 2019를 써넣었다. 엠블럼 말고는 어디에도 차 이름을 써넣지 않았다. 굳이 이름표를 붙이지 않아도 알아볼 것이라는 자신감이다. 영국이나 유럽이라면 모를까. 이곳 한국에선 의외로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고수는 잔기술을 쓰지 않는다. 벤테이가를 포함해 벤틀리의 디자인이 그렇다. 잔기술을 배제한 디자인이다. 맛없기로 유명한 영국 음식처럼, 덩어리 자체로 다가오는 단순한 디자인이다. 화려하거나 현란하지 않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원형 헤드램프는 이 차의 단순한 디자인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리어 컴비네이션 램프 역시 뭉툭한 덩어리로 구성했다. 재료 자체의 맛으로 승부를 걸듯, 기교 없는 디자인이 주는 묵직한 아우라가 있다.

실내로 들어서면 대저택의 고급가구에 들어앉는 느낌이다. 압도당하는 느낌. 기가 죽는다. 럭셔리 자동차의 공식, 가죽과 금속 그리고 나무를 적절하게 배치한 최고급 수준의 인테리어다. 밝은 브라운 컬러의 가죽으로 꾸민 실내는 무겁지 않다.

클래식한 멋이 있다. 브라이틀링 시계다. 스위스의 시계 명가 브라이틀링과 벤틀리가 협업해서 만든 시계다.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임을 자부하는 브랜드의 협업. 윙 엠블럼을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엔진의 실린더 밸브를 응용한 송풍구 조절 장치도 다른 차에서는 만나기 힘든 클래식한 느낌을 잘 살려내고 있다. 밸브를 누르고 당기며 송풍량을 조절하게 된다. 벤틀리의 남다른 멋이다.

길이가 5,140mm 너비가 딱 2m로 큰 덩치에 스티어링 휠은 불과 2.3 회전에 그친다. 스포츠카 못지않은 날렵한 조향 반응을 기대할 수 있겠다.

나이트비전은 적외선을 이용해 시야를 확보해준다. 계기판에 흑백으로 전방 상황이 드러나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밤에 특히 유용한 기능이다.

뒷공간은 여유롭다. 무릎 앞으로 주먹 두 개 반 정도의 공간이 있다. 머리 위로는 주먹 하나 반 정도다. 넉넉한 공간이 주는 여유로움이 있다. 가죽으로 마감한 테이블조차 최상급의 고급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암레스트에 작은 터치 모니터로 엔터테인먼트 공조 열선 등을 조절할 수 있다.

뒷 시트는 뒤로 좀 더 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앞뒤로 슬라이딩도 가능하다. 누울 정도는 아니지만 가장 편한 자세를 잡는 데 부족함이 없다. 또한 시트를 접어버릴 수도 있어 필요할 때 트렁크를 넓게 쓸 수 있다. 트렁크는 484ℓ에서 최대 1,774ℓ까지 확장할 수 있다.

드라이브 셀렉터와 올터레인 셀렉터를 한데 묶었다. 드라이브 셀렉터, 즉 온로드 주행 모드는 스포츠 벤틀리 컴포트 커스텀으로 구성했다. 승차감과 성능에 최적화했다는 ‘벤틀리 모드’가 눈에 뜨인다. ‘오토’ 모드로 인식하면 된다. 연비 최우선 모드는 의미 없다는 뜻일까. 에코 모드는 없다.

오프로드 주행모드인 올터레인 셀렉터는 지형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눈 풀밭, 흙 자갈 진흙, 다져진 길, 모래 언덕 등을 택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차 타고 오프로드에 들어설 일이 있을까 싶다. 3억 원을 호가하는 차를 타고 차량 손상 위험 부담이 큰 오프로드에 들어서는 건 무모한 일이다. 올터레인 셀렉터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충분히 오프로드를 잘 달릴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으나, 굳이 이를 확인할 필요는 없겠다.

ZF 8단 자동 변속기 변속의 느낌이 아주 좋다. 변속레버의 벤틀리 로고를 엄지손가락으로 누르면서 조작하는 느낌은 마치 전투기에서 미사일 발사 버튼을 누르는 느낌이다.

에어 서스펜션을 적용한 멀티모드 서스펜션은 셀프 레벨링 기능이 있어 4단계로 차체 높이를 조절한다. 주행 상황에 따라, 노면 상태에 따라 차체 높이가 조절된다.

서스펜션은 탄성이 좋다. 딱딱하지도 말랑하지도 않다. 적당한 탄성을 가진 글러브를 끼고 때리는 기분 좋은 타격감이다. 수시로 나타나는 과속방지턱이 성가시지만 여유 있게 충격을 받아들인다. 노면의 굴곡 노면의 충격을 받아들이는 느낌이 상당히 고급스럽다.

V8 4.0 트윈터보 엔진은 8단 자동변속기의 조율을 거쳐 550마력의 힘을 낸다. 대단한 힘이지만 600마력 넘는 W12 엔진에 비하면 보급형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550마력은 겸손해야 하는 게 벤틀리 가문이다.

스포츠 모드에서 엔진 사운드는 무척 매력 있다. 툭 가속 페달을 밟으면 훅하는 엔진 숨소리가 살아난다. 그 즉시 시트가 몸을 밀어내며 달리기를 시작한다. 순식간에 속도를 올린다. 가속 페달 제일 끝에 밟히는 킥다운 버튼까지 밟을 새가 없을 정도다.

엔진 사운드는 막 내지르는 가벼운 소리가 아니다. 굵은 톤으로 낮게 깔리는 소리다. 힘이 있고 박력이 있는 상당히 매력적인 사운드다.

순항할 때에는 8개의 실린더 중 4개를 쉬게 한다. 탄력 주행할 때, 굳이 8개 실린더를 다 사용할 필요 없다면 4개의 실린더만 사용하는 식이다. 연비 개선에 효과가 있다.

시속 100km 8단에서 rpm은 1,500 정도를 보인다. 같은 속도에서 3단에서 내리면 rpm 약 4,500에 이른다. 엔진 회전수는 비교적 낮은 편이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데 차체를 가르는 바람 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리지 않는다. 노면 잡소리는 거의 없다. 타이어 마찰음, 노면 잡소리를 잘 걸러내고 있다. 엔진 소리와 바람 소리 정도가 실내로 들어온다. 바람 소리도 빠르게 달리는 속도에 비해서 상당히 낮은 편이다. 주행안정감도 높아 체감속도가 실제 속도보다 매우 낮다. 아주 빠른 속도에서 안정감이 대단하다. 불안하지 않다. 차체가 높은 SUV지만 스포츠카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주행안정감이다.

문제는 있다. 몇 차례 고속 주행을 마치고 났더니 연료 게이지가 뚝뚝 떨어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다.

고성능의 전제조건, 고성능 브레이크다. 벤테이가 V8 역시 브레이크에 신경을 많이 썼다. 앞에 440, 뒤에 370mm의 직경을 가진 디스크 브레이크와 10개의 피스톤을 적용하고 있어서 좀 더 강한 제동력을 확보하고 있다.

시속 100km에서 체중을 실어 브레이크를 밟았다. 안전띠가 몸을 꽉 조인다. 브레이크 페달이 부르르 떨고 비상등이 스스로 작동한다. 차체는 앞으로 살짝 숙여지는 정도. 속도와 무게가 상당한데 가뿐하게 제동을 받아낸다. 고성능에 걸맞는 브레이크 시스템을 확보했다.

전자식 액티브 롤링 제어 기술이 안정적인 코너를 지원한다. 벤틀리 다이내믹 라이드 시스템이다. 코너에서 어느 한쪽으로 쏠리는 횡령을 상쇄시켜 주는 개념이다. 기우는 쪽의 반대쪽 타이어 접지력을 좀 더 높여 고른 접지력을 확보하는 것. 덕분에 빠른 속도를 유지하면서도 안정감 있게 코너에 진입하고 탈출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차의 완성도가 상당히 높다. 프리미엄 SUV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이 차를 완성시키고 있다.

고급 소재를 아낌없이 사용한 최고 수준의 인테리어, 시종일관 안정된 자세를 유지하는 고급스러운 주행 품질, 탁월한 고속 주행 안전감 등, 브리티시 럭셔리 SUV를 제대로 보여주는 차다.

GPS 계측기를 이용해 0-100km/h 가속 테스트 결과는 4.86초. 메이커가 밝힌 공식 기록은 4.5초다. 이 차의 공차중량은 2,484kg으로 마력당 무게비가 4.5kg에 불과하다. 계측을 위해 출발하면 마치 비행기가 이륙할 때의 느낌을 받는다. 날개를 펴면 날아오를 것만 같다.

파주 헤이리마을 출발해서 서울 교대역까지 컴포트 모드로 55km를 달려 실주행 연비를 측정한 결과는 9.8km/L. 공인 복합 연비 6.0km/L를 훌쩍 뛰어넘는 연비다.

벤테이가 V8은 2억 8,000만 원서부터 시작한다. 옵션을 선택하면서 3억 원을 훌쩍 뛰어넘게 되리라는 것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부자들이 타는 비싼 차다. 비싸다는 지적은 벤틀리에겐 아무 의미 없다.

오종훈의 단도직입
그런데, 차선이탈 방지장치가 없다. 어댑티브 크루즈컨트롤은 있는데, 차선이탈 방지장치가 없어 반자율주행은 절반의 시스템에 머문다. 얼마짜리 찬데 이게 없을 수 있을까. 비싼 차여서 인심도 넉넉할 줄 안다면 오산이다. 기본 상품 구성이 너무 박하다. 벤틀리가 부자인 게 아니다. 부자는 이 차를 사는 고객이다.
엔진스톱 시스템이 작동하면 스티어링 휠은 잠긴다. 럭셔리 SUV라면 적용하는 기술들도 최고 수준이어야 할 것 같은데 아니다. 차가 멈추고 엔진도 따라 멈추는데 스티어링휠을 살짝 움직이면 엔진이 부르릉 살아난다. 이런 부분만 보면 보급형 모델이라더니 정말 보급형으로 만들었나 싶다.

오종훈 yes@autodiar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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