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현대자동차의 팰리세이드가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해 한때 뜨거운 논란이 있었다.
어린 아기를 태운 여성 운전자가 후진기어가 들어간 줄 모르고 비탈길을 내려가다가 시동이 꺼지면서 전복되는 사고였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제작사는 후진기어를 넣은 상태로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변속기 보호 차원에서 시동이 꺼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소비자 실수로 후진기어가 들어갔다 해도 주행 중에, 그것도 내리막길에서 시동이 꺼지면 브레이크가 듣지 않아서 사고 날 것이 뻔한데 차는 문제가 없다고 하는 제작사에 대해 운전자는 분노했다.
자동차 사고가 발생하면 주로 일방적으로 제작사는 죄인이 되고, 소비자는 피해자가 되던 종래의 패턴과는 달리, 이번 사건의 경우에는 다각도의 의견이 나왔다. 심지어 피해자를 비난하는 의견도 있었다.
블로그나 유튜브를 이용하는 차고 넘치는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에게 현대차의 품질 문제는 가장 큰 먹음직한 고깃덩어리임이 틀림없다. 이전에는 품질 문제든 성능 문제든 언론에 발표가 되어야 우리가 그 내용을 인지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문제를 당한 당사자나 그 주변 사람, 심지어는 그 당사자와 무관한 사람들마저도 손쉽게 한 줄 올릴 수 있는 시대이니 온 세상에 알려지는 건 순식간이다. 일단 사건이 터지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서 물어뜯어 이리저리 헤쳐 놓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이다.
팰리세이드 전복사건으로 웅성거리던 난리 통에 한쪽에서는 북미 시장에서 현대자동차의 프리미엄 브랜드인 제네시스가 미국 시장조사업체의 내구품질 평가에서 조사 대상에 포함된 첫해 1위를 차지했다는 낭보(?)가 전해졌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제이디파워(J.D. Power)가 발표한 ‘2020년 내구품질조사(VDS, Vehicle Dependability Study)’에서 전체 조사 대상 브랜드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점수를 기록해 최우수 내구품질 브랜드상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VDS는 차량 구입 후 3년이 지난 고객들을 대상으로 177개 항목에 대한 내구품질 만족도를 조사한 뒤, 100대당 불만 건수를 집계한다. 지난 2016년 8월 미국 시장에 첫선을 보인 제네시스는 이번에 처음으로 VDS 평가 대상에 포함되었음에도 덜컥 1위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현대차가 차를 잘못 만들어서 미국 시장이라면 회사 문 닫았을 거라고 비난하는 반면, 한쪽에서는 미국 내구품질조사에서 1등을 했다고 칭찬을 하고 있으니 듣는 소비자는 정말 판단하기 어렵다.
현대차의 품질 문제 이슈가 발생할 때 여기저기서 달려들어 물어뜯으려고 하는 데는 어쩌면 오만한 1위에 대해 소비자들이 일시적으로나마 시원한(?) 느낌을 받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소비자들이 현대차를 사지만 할 말도 많고 불만도 많을 것이다. 보통사람들이 차를 바꾸려면 허리띠를 조여 매고 몇 년 동안 할부로 갚아야 한다. 게다가 한 가족의 생명을 맡겨야 할 차이니 심사숙고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 차를 와이파이로 유튜브 시청하면서 조립을 한다고 하고, 여름 휴가 때나 파업 중에 나오는 차는 아르바이트생이 조립한 차니 사지 말라고 하기도 한다. 바쁜 시간을 내서 새로 구입할 차를 구경하러 온 가족이 전시장에 가니 웬 아버님이 앉아계셔서 이것저것 물어보기가 송구스럽기도 하고.
그렇게 구입한 차가 문제가 있어서 AS 받으러 가니 부당한 대우를 하고 작업자들이 상전 노릇 하는 행태라든가, 문제가 발생하면 일단 회사는 문제없고 소비자의 잘못으로 밀어붙이는 제작사의 태도가 소비자들의 분통을 터뜨리게 한다. 오죽하면 고장이 잦아서 차를 교체하거나 환불을 받으려면 소비자보호법보다도 일단 차를 구입한 지점에 가서 드러누워야 한다는 조언까지 나올까.
수입차 소비자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하루가 멀다고 해당 제품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 “우리 차는 문제 없다, 해외에서는 문제가 없는데 한국에서만 문제가 발생하니 소비자의 잘못이다”라며 상대를 안 하려고 하거나 작은 조치도 해외 본사의 승인과 지침이 있어야 한다고 하니 뭔가 바로잡으려면 하세월이다.
우리 소비자들도 이제는 당당하게 그들의 요구를 주장하고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동차 메이커들과 시장체제에 대한 이성적이고 생산적인 비판과 감시체제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제작사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게 유도하고 필요하다면 정부 기관이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해야 한다.
이제는 소비자들에게도 귀에 익은 IIHS나 컨슈머리포트 같은 단체와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들 알 것이다. IIHS(Insurance Institute for Highway Safety, 미국 고속도로 안전보험협회)는 정부 기관이 아니다. 1959년 설립된 미국의 사설 자동차 안전 연구기관으로 자동차 관련 보험사들이 예산을 지원한다.
이 연구소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유는 정부 기관보다 앞서나가기 때문으로, 각종 연구를 통해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HTSA)에 각종 안전장치를 의무화할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2005년, ESC(Electronic Stability Control. 전자식 차체자세 제어장치)가 의무화되면 매년 7천 건의 사고를 줄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연구소는 매년 자체 기준에 맞춘 테스트를 통해 차량의 안전등급을 매기고 가장 안전한 차량을 선정한다. 소비자들은 그 결과에 주목한다. 안전등급은 부문별로 Good / Acceptable / Marginal / Poor(우수/양호/미흡/최악)로 매겨지는데, 미국에 판매하고자 하는 모든 차량 제조사가 이 연구소의 기준을 맞추기 위해 설계를 개선하니 어찌 보면 자동차 설계의 바이블이자 지침서다. IIHS는 보험사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 보니 탑승자의 안전은 물론, 차량 충돌로 인한 예상 수리비까지 고려해 등급을 매긴다.
또 미국 소비자들의 나침판 역할을 한다는 컨슈머리포트(CONSUMER REPORT)도 자주 언급된다. 미국, 영국, 독일 등 주요 국가에서는 소비자들이 제품ㆍ서비스 구매 때 참고할 수 있는 각종 정보가 공개된다. 그중에서도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으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는 게 미국의 ‘컨슈머리포트’다. 컨슈머리포트는 1936년 미국의 비영리단체인 소비자연맹이 창간했다. 이 보고서는 구독료와 기부금만으로 운영된다. 웹 회원이 약 330만 명에 달하고 컨슈머리포트 월간지의 경우 연간 구독자가 410만 명을 넘나든다.
컨슈머리포트가 이렇게 탄탄한 독자층과 권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독립성에 있다. 컨슈머리포트의 보고서는 평가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 가지 원칙을 지키고 있는데 첫째, 외부 광고를 받지 않으며 둘째, 제품이나 서비스의 샘플을 제공받지 않고 있으며 셋째, 기업이 컨슈머리포트의 평가 결과를 광고에 이용할 수 없도록 한다. 대신 이 회사는 기업과 소비자 모두 신뢰할 수 있을 정도의 결과를 내놓는다.
자동차 부분에 대한 컨슈머리포트의 결과 발표는 제조사에겐 그 어느 기관의 평가보다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고 소비자들에겐 제품 선택의 나침판이 된다.
우리나라도 2012년 1월 11일부터 공정거래위원회가 주관하고 한국소비자원이 운영하는 소비자 종합정보망으로 “스마트컨슈머”라는 소비자 정보 포털싸이트를 시작했다. 한국판 컨슈머리포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스마트컨슈머는 ‘비교공감’이라는 새로운 브랜드 네임으로 변경되어 운영 중이다. 이 사이트는 공정하고 정확한 시험 및 조사를 통해 한국소비자원과 소비자단체가 생산하는 비교정보를 게재하며 ‘비교정보’ 부분은 미국의 컨슈머리포트를 벤치마킹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특히 많은 자동차 소비자들이 기대한 자동차나 자동차용품에 대한 품질 비교정보가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라 정말 이게 한국판 컨슈머리포트가 맞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수준이다. 우리나라 자동차 매체들의 상대적 영세성으로 선진국의 자동차 전문지들처럼 다양한 품질 비교 평가를 할 수 없어서 더욱 스마트컨슈머(비교공감) 같은 단체가 역할을 해줘야 하나 과연 우리 소비자들이 차를 구입하고자 할 때‘비교공감’ 사이트를 참조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얼마나 될는지.
세계 5위권 자동차 생산 국가로서 1년에 신차와 중고차 400만대 전후의 자동차 거래가 이뤄지고 있는 나라에서, 그럼에도 자동차나 자동차 구매 관련해 신뢰할 만한 제품 정보를 알려주는 곳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마치 성장기 어린이가 키만 훌쩍 자라고 근육이 없는 꼴을 보는 듯하다.
남의 나라 IIHS니 컨슈머리포트니 블루 북이니 하는 자료만 언급하고 한탄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 시장에도 우리 정서와 소비자 입맛에 맞는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는 단체가 생겨 막연한 카더라 통신이나 맹목적인 헐뜯기, 소비자 무시가 발을 붙일 수 없는 성숙한 자동차 시장 환경이 조성되기를 바란다.
필자 유재형은 1985년 현대자동차에 입사, 중대형 승용차 상품기획을 맡았으며 현대모비스 전신인 현대정공에서 갤로퍼, 싼타모 등의 개발에 참여했다. 이후 현대자동차로 옮겨 싼타페, 투싼 등 SUV 상품개발과 마케팅을 거쳐 현대자동차 국내상품팀장을 끝으로 퇴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