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보레가 트레일블레이저를 출시했다. 트레일블레이저, 선구자 혹은 개척자라는 의미를 담은 이름. 개발과 생산을 한국지엠이 담당한 쉐보레의 글로벌 전략차종이다. 한국지엠의 경영정상화의 키를 쥔 모델. 회사의 명운이 달린 차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트랙스와 이쿼녹스 사이에 자리하는 컴팩트 SUV다. 차급을 따지기가 애매한 면이 있다. 크기로는 C 세그먼트이고 엔진 배기량으로 보면 소형인데 출력을 보면 중형에 버금간다.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는, 틀을 벗어난 SUV다.

듀얼 포트 그릴, 과감한 크롬 라인, 얇은 주간주행등과 그 아래 배치한 헤드램프, 측면의 강한 캐릭터 라인 등이 디자인 포인트다. 보디 컬러와 다른 루프 디자인과 블랙 필러는 이제 소형 SUV에서 많이 사용하는 형식으로 지붕이 떠 있는 듯한 모습을 연출한다.

내비게이션 모니터는 센터페시아에 매립했고 인테리어는 단정하게 마무리했다. 컴바이너 타입의 헤드업 디스플레이가 자리했다.

디테일을 조금씩 달리해 각각의 개성을 살린 LS와 LT, 프리미어, 액티브, RS 5개 트림으로 라인업을 구성했다. 1.2 터보와 1.35 터보, 무단변속기와 9단 자동변속기, 전륜구동과 사륜구동을 유기적으로 조합해 다양한 버전을 선보이고 있다.

최고 트림인 RS를 택해 시승에 나섰다. 1.35 가솔린 터보 엔진에 9단 자동변속기, AWD를 장착한 모델이다.

RS는 다크 크롬 그릴, RS 레터링, 블랙 보타이 엠블럼, 카본 패턴이 적용된 스키드 플레이트, RS 전용 18인치 알로이 휠, 라운드 타입의 듀얼 머플러 등을 적용해 외관을 차별화했다. 인테리어에서도 D컷 스티어링 휠, RS 전용 계기판, 레드 스티치 장식 등으로 최고 트림의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4,425×1,810×1,660mm의 크기에 2,640mm의 휠베이스를 갖췄다. 뒷좌석 공간은 생각보다 넓다. 무릎 앞으로 주먹 두 개가 들락거리고 머리 위로는 주먹 하나가 꽉 차게 들어간다. 차급에 비하면 나무랄 데 없는 공간이다. 공간이 주는 여유로움이 있다. 크기는 작지만, 공간은 옹색하지 않다.

1.35ℓ 배기량에서 나오는 156마력의 힘. 말리부에 올라갔던 그 엔진이다. 터보를 얹었다고는 하지만, 이 작은 엔진에서 이 정도의 힘을 만들어낸다는 게 여전히 생경하다. 배기량과 출력의 부조화. 배기량은 허수에 가깝다. 터보와 9단 변속기가 빚어낸 156마력이 운전자가 직접 마주하게 되는 힘이다.

출발을 위해 가속페달을 밟았는데 툭 치고 나가는 힘이 강하다. 필요 이상으로 가속페달을 밟은 결과다. 배기량을 생각해 조금 더 밟았는데, 그럴 필요 없었다. 가솔린 엔진인데도 최대 토크가 1,600rpm부터 나온다. 중저속 구간에서도 힘이 부족하지 않다.

시속 100km에서 rpm은 1,400을 맴돈다. 배기량이 적어 회전수를 조금 더 올려야 할 듯하지만, 낮은 회전수로 100km/h를 커버하고 있다. 9단 자동변속기가 엔진 배기량의 한계를 충분히 커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9단 변속기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중저속은 물론 고속주행에서도 엔진은 시종일관 여유가 있었다. 엔진 배기량을 보면 고속주행을 힘들어할 법도 하지만, 그런 기색은 조금도 없다. 엔진 배기량은 그냥 숫자일 뿐 주행성능은 배기량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

실내는 시끄럽지 않다. 자잘한 소음이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법도 한데 그렇게 시끄럽지 않았다. 엔진은 차분하게 움직이고 시멘트 도로 같은 거친 노면을 달릴 때 노면 소음이 잔잔하게 깔리는 정도다. 9단 변속기가 엔진을 차분하게 조율하고, 액티브 노이즈 캔슬레이션을 적용해 발생하는 소음도 적절하게 줄인다.

노멀모드에서는 느슨한 편안함이, 스포츠모드에선 긴장감 있는 힘이 느껴진다. 엔진 사운드는 속도와 비례해 높아지며 피크를 친 다음 고속주행 구간에서 바람 소리에 파묻히며 점차 사라진다.

쉐보레가 1.35 엔진에 9단 자동변속기를 사용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지엠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말리부에도 조만간 이 변속기가 적용될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9단 변속기는 또, 사륜구동과 짝을 이룬다. 앞바퀴 굴림 방식에는 무단변속기가, AWD에는 9단 변속기가 짝을 이루는 것. 스위처블 AWD는 주행 중에 간단히 버튼을 누르는 것만으로 구동 방식을 바꿀 수 있다. 필요에 따라 사륜구동으로, 혹은 앞바퀴 굴림으로 변환할 수 있다. AWD인 경우에 리어 서스펜션은 Z 링크 방식을 적용했다.

능동형 주행보조 장치는 알차게 채워 넣었다. 후방주차 보조시스템, 전방충돌 경고시스템, 저속 자동 긴급 제동시스템, 전방거리 감지시스템, 차선이탈 경고 및 차선유지 보조시스템, 전방 보행자 감지 및 제동시스템, 크루즈컨트롤이 기본 트림인 LS부터 기본 적용된다. 후측방 경고시스템, 사각지대 경고시스템, 어댑티브 크루즈컨트롤 등은 패키지 옵션으로 추가할 수 있다. 차급에 비해 과하다 싶을 정도다.

능동형 주행보조 시스템을 모두 장착한 시승차는 잠시 스티어링 휠에서 손을 떼도 반자율 주행이 가능했다. 차선을 벗어나지 않고 차로와 차간거리를 유지하며 달렸다. 가볍게 스티어링휠에 손을 얹고 있으면 차가 알아서 운전하는 느낌이다. 내 손 아닌, 숙련된 드라이버가 내 팔을 감싸고 있는 기분이다.

대체로 완성도 높게 작동했지만, 아주 가끔 차선을 밟고 차선 안으로 들어왔고, 더 아주 가끔은 차선을 벗어나기도 한다. 핸들에서 손을 떼서는 안 되는 이유다.

배기량 1.35가 아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다운사이징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이 엔진 덕분에 제3종 저공해차량 인증을 받았다. 공영주차장 할인 등 저공해차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배기량이 적어 자동차 세금도 부담이 없다.

오버 스팩. 신차발표 현장과 시승하는 동안 내내 머릿속을 채운 생각이다. 작은 차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장비들을 아낌없이 채워 넣었기 때문이다. 9단 자동변속기, AWD, 7 스피커를 적용한 보스 오디오, 어댑티브 크루즈컨트롤과 차선유지 보조 장치 등이 그렇다.

한국지엠이 독하게 차를 만든 느낌이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가격이 단적으로 이를 말하고 있다. 트레일블레이저의 시작가격은 LS인 1,995만 원부터다. 시승차인 RS는 2,620만 원. “현대차 투싼 크기에 기아차 스토닉의 가격”이라는 설명에 트레일블레이저의 지향점이 담겨있다. B, C 세그먼트를 모두 공략하겠다는 의미다.

성능과 상품성, 가격 등을 볼 때 경쟁사들이 긴장해야 할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트레일블레이저가 불러올 바람이 어쩌면, 태풍일지도 모르겠다.


오종훈의 단도직입
불편하다기보다 고치면 더 좋겠다는 부분이 눈에 띈다.
변속레버를 통해 잔진동이 지속적으로 올라온다. 가속하면 그 진동은 조금 더 커진다.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무심코 변속레버에 손이 갈 때 가끔은 거슬린다.
토글스위치도 그렇다. 어색하다. 센터 콘솔 위에 팔을 얹고 엄지손가락으로 수동변속을 하게 되는데 엄지가 토글을 작동하기 위해선 손목을 살짝 틀어야 한다.

오종훈 yes@autodia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