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 신사옥 부지가 내려다보이는 서울 강남 어느 빌딩 39층. 잘 꾸며진 실내에 7세대 5시리즈 두 대가 단정하게 자리 잡고 기자들을 맞았다. 자동차용 엘리베이터가 있을 리 만무한 곳, 이 녀석은 도대체 어떻게 이 높은 곳에 올라왔을까.
차를 완전히 분해해 39층으로 나른 뒤 다시 조립했다. 이런 무모한 자신감이라니. 발표 행사를 마친 뒤에는 다시 역순으로 지상에 내려야 한다. 한국 스테프들이 진행했다. BMW ‘코리아’의 기술이 이 정도라고 자랑하고 싶었던 게다. 스케일이 다르다.
비슷한 사례를 안다. 포르쉐가 중국에서 파나메라를 이런 식으로 발표했었다. 1907년 열렸던 파리-북경 랠리때 험한 산을 넘기 위해 경주차를 분해해 넘어갔다는 얘기도 있다. 못 말리는 엔지니어들이다. 하지만 그런 무모함은 잔잔한 스토리로 남아 역사가 되고 브랜드의 자산으로 남는다.
“그 미친 짓을 왜 하지?”와 “그거 재미있겠다 한 번 해보자”는 자세의 차이. BMW는 후자다.
신형 5시리즈는 봄비와 함께 우리 앞에 왔다. 강남을 출발해 영종도 BMW 드라이빙센터까지 달려가 서킷 주행까지 이어지는 재미난 시승을 했다.
덩치는 커졌고, 몸무게는 100kg가량 줄였다. 체질량 지수가 좋아진 셈. 길이는 4,936mm로 29mm 길어졌다. 너비는 1,868mm로 8mm를 키웠고 15mm 높아진 1,479mm의 키로 완성됐다. 휠베이스도 7mm를 더 키워 2,975mm에 달한다.
대부분의 중형 세단은 패밀리세단을 지향한다. BMW 5시리즈는 ‘비즈니스 세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슈트를 잘 차려입은 비즈니스맨의 이미지가 그대로 디자인에 투영됐다.
키드니그릴, 호프 마이스터킥 같은 디자인 DNA는 여전히 살아있다. 이전 모델이 살짝 앞이 내려앉아 수그린 인상이었다면 신형은 고개를 딱 치켜든 도도한 앞모습을 만들어냈다. 앞뒤에서 시작되는 측면 캐릭터 라인은 서로 엇갈리며 오묘한 곡면을 만들어냈다.
시승차는 520d. 2.0 트윈터보 디젤 엔진은 190마력의 힘을 4,000rpm에서 토해낸다. 최대토크는 40.8kgm로 1,750~2,500rpm 구간에서 고르게 나온다. 저회전 영역에서 굵은 토크가 밀어 올리면 고회전 영역에서 최고출력이 이를 받아 고속주행을 실현한다. 이 힘을 조율하는 건 8단 자동변속기. 1단 기어비가 무려 5대 1이다. 6단에서 1:1을 맞추고 7, 8단은 오버드라이브 상태가 된다.
앞 뒤 타이어 사이즈는 다르다. 구동바퀴인 후륜에 275/40R18 사이즈를 끼웠다. 앞 타이어는 245/45R18.
힘자랑은 옛날 얘기다. 지금은 연비와 효율을 강조하는 시대의 끝자락, 자율운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신형 5시리즈는 한국 소비자들만을 위해 두 개의 선물을 가지고 왔다. M 스포츠 패키지와 반자율주행 기술을 국내 시판 모든 신형 5시리즈 모델에 기본 탑재키로 한 것. 소비자들을 향한 강렬한 구애다. 사랑 받고 싶다는 간절한 신호.
비가 내려 꽉 막힌 도심에서 액티브 크루즈컨트롤과 조향보조 시스템이 연출하는 반자율운전은 재미있다. 방향지시등을 작동하지 않고 차선을 넘으려면 누군가 핸들을 쥐고 안 놓아주는 것 같은 반발력을 느낀다. ‘퍼스널 코드라이버’ 보조운전자가 함께 운전하는 셈이다.
반자율운전 시스템은 완성도가 제법 높아졌다. 차선을 잘 읽고 대부분 이탈하지 않았으며 차간거리 유지가 잘돼 충돌 위험도 크게 줄었다. 얄밉게 끼어드는 차를 막기 위해 바짝 붙일 땐 스스로 제동하는 경우가 있어 애로가 있지만, 양보하면 된다.
520d는 점잖았다. 가속반응과 엔진 사운드가 그랬다. 깊숙하게 가속페달을 밟아도 낮게 깔리는 엔진 소리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았다. 열창을 해야 하는 고속주행에 접어들어도 소리는 대체로 낮았다. 전형적인 바리톤 음색.
가속반응도 그랬다. 빠르게 치고 나가는 게 아니다. 꾸준히 밀고 오르는 느낌. 계측기를 이용해 시속 100km 도달 시간을 체크해 보니 8.54초. 7.5초라고 하는 메이커 발표와는 약 1초 차이가 났다. 중형세단의 무난한 가속성능이라고 보면 되겠다.
실내는 조용했다.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아니었다면 훨씬 더 조용했을 터. 노면 잡소리는 비가 내리면 더 조용해지는 법이다. 소리가 신경 쓰인다면 오디오를 틀면 된다.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이 귀에 착 감긴다.
헤드업 디스플레이는 화면이 더 넓어졌다. 시원하다. 꼭 필요한 주행정보를 보여줘 시선을 절약할 수 있다.
신형 5시리즈는 수화도 한다. 간단한 손동작으로 전화를 받고, 거절하고, 오디오 볼륨을 조절하는 제스처 컨트롤을 탑재한 것. 허공에 손을 움직이면 오작동이 거의 없이 제대로 알아듣는다. 7시리즈에서 시작해 5시리즈로 확대된 기능이다. 수화 실력은 동생이 더 좋은 듯.
한국말도 잘 알아듣는다. 음성명령을 통해 전화걸기, 오디오 듣기, 라디오 방송 수신하기 등등이 가능했다. 스크린에 손을 댈 필요가 없어서 좋다. 내비게이션 목적지 입력은 손글씨로도 가능하다. 물론 한글로 쓰면 된다. 이래 저래 말 잘 듣는 녀석, 언어능력이 탁월한 녀석이다. 부럽다.
디스플레이키도 7시리즈에서 건너왔다. 자동차의 다양한 정보를 보여주는 키다. 실내등 옆에는 SOS 버튼이 있다. 비상시 콜센터와 연결할 수 있다. 있는 것 만으로도 든든해지는 장치다.
영종도 BMW 드라이빙 센터 서킷에서는 520d x드라이브로 바꿔 탔다. 코너가 끝없이 이어지는 짓궂은 코스. 직선로에선 시속 140km 전후를 밟을 수 있었다. 코너에선 엔진 출력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ECS 개입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좌우로 비틀어지는 길에서 눈 딱 감고 차를 던져도 어느 정도 이상 차가 흔들리지 않았다. 얄밉게 중심을 잡는다. 밀어도 밀어도 넘어지지 않는 오뚜기였다. 앞뒤의 무게 배분이 좋고, 사륜구동이 딱 버티고, 주행안정장치가 눈에 안보이게 운전자를 돕는 셈이다. 아무리 괴롭혀도 허허실실 웃는 마음 넉넉한 친구처럼, 좀처럼 무너지지 않았다.
520d는 6,630만원이다. 연비는 14.0km/L.
5시리즈는 중원의 왕자다. BMW의 핵심 모델이고 수입차 시장의 중원을 지배하는 존재다.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온 5시리즈의 등장으로 시장은 또 한 번 뒤집어지게 생겼다.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벤츠 E클래스와 피할 수 없는 한 판 승부가 이제 막 시작됐다. 흥미진진한 게임을 지켜보기로 하자.
오종훈의 단도직입
힘자랑이 옛날 얘기이기는 하지만, 가속이 조금은 더 시원했으면 좋겠다. 가속페달을 꾹 밟아도 서두르는 기색 없이 움직인다. 힘의 균형을 조절해 서두를 땐 서둘러줬으면 좋겠다.
돌출된 모니터는 불편하다. 차는 분명히 더 안전해졌지만 그래도 안전에 대한 긴장감을 늦춰선 안된다. 돌출된 모니터는 분명히 안전에는 도움이 안된다.
트렁크 상단에 노출된 철판. 프리미엄 브랜드라면 이를 바라보는 소비자의 불편한 마음까지 헤아려야 한다. 잘 정돈된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보이지 않는 게 맞다.
오종훈 yes@autodia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