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타이 풀고 구두를 벗었다. 두터운 점퍼에 트래킹화로 갈아 신었다. 숨통 막히는 일상을 나 몰라라 내려놓고, 도시 탈출을 감행해야 한다. 되도록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야 하는 차다. 시승 날짜를 받고 입가엔 미소가 활짝 번지고 마음은 싱숭생숭 거렸다. 바람난 봄처녀, 님을 기다리듯 그날을 손꼽았다.
이 차 앞에 서면 도저히 객관적일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차다. 따라서 이 시승기는 편파적이고, 논리적이지 않으며, 근거 없는 애정을 바탕으로 쓴 글임을 미리 밝힌다.
랭글러다. 시승차는 지프 랭글러 언리미티드 루비콘 이라는 정식 이름이 있지만 그냥 랭글러면 족하다.
기자 초년병 시절, 랭글러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차였다. 빨간 랭글러를 타고 나가는 선배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시간은 흘러 랭글러를 허락받을 수 있었고, 유명산 꼭대기로, 강원도 방동 약수를 지나 험로로, 제주도의 한라산 기슭으로, 라스베이거스와 데스밸리로. 참 많은 곳을 랭글러와 함께 다녔다. 아주 오래된 연인처럼, 랭글러와는 함께 한 많은 기억들이 있다.
전쟁터를 누비던 군용 지프에서 시작된 지프 랭글러다. 도시에 길들여져, 많은 편의장비를 달고 순둥이가 된 차들과는 많이 다르다. 그래서 재미있고, 매력이 넘친다. 물론 어떤 이들에겐 전혀 매력적이지 않고 재미 없는 차 일수도 있다.
스타일부터 그렇다. 굳이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에어로 다이내믹에 크게 상관하지 않는 고집스런 스타일. 라디에이터 그릴과 앞창을 수직으로 세웠다. 맞바람에 고개 숙일 생각이 없는 것. 그냥 밀고 나갈 뿐이다. 그래서 80km/h 전후의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에서도 바람 소리가 제법 들린다. 패인 길이나 과속방지턱을 지날 땐 가끔 찌그덕 거리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엔진은 또 어떤가. V6 3.6 가솔린 엔진은 284마력의 무지막지한 힘을 낸다. 그리 조용하지도 않은 엔진이다. 표준연비 7.4km/L로 5등급. 다운사이징이라는 도도한 흐름을 이 차는 신경 쓰지 않는다. 전교 꼴찌 성적표를 씩 웃으며 자랑스럽게 내놓는 아이를 닮았다. 에너지 효율? 일부러 낭비할 필요는 없지만 기름 한 방울 아끼려고 안절부절하는 모습은 이 차와 거리가 멀다.
문짝 4개를 다 떼어내고, 지붕까지 들어낼 수도 있다. 전투형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얘기다. 다 떼어낸 채 뼈대만 남기고 달리다가 폭우를 만나 낭패를 겪었다는 얘기는 랭글러 오너들의 단골 레퍼토리다. 랭글러 오너라면 이런 경우, 당당히, 당연하다는 듯 기죽지 않고 즐기면서 달려야 한다. 랭글러가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상황이므로.
랭글러는 오프로드에서 타야 한다. 랭글러에게 온로드는 오프로드로 가는 길목일 뿐이다. 굳이 온로드 성능에 얽매이지 않는 이유다.
먼 길을 달려 춘천 인근의 한적한 숲 속으로 들어섰다. 원래 목표했던 길은 때마침 내린 눈 때문에 출입통제중이어서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어야 했다.
오프로드의 랭글러는 물 만난 고기보다 더 활기찼다. 파트타임 사륜구동은 어떤 상황에서도 대응가능하다. 2H와 4H, 4L을 상황에 맞게 선택하며 움직이면 길이 아닌 곳에서도 얼마든지 기동이 가능했다. 굿이어가 랭글러 전용으로 만든 타이어까지 적용했다. 빠르고 가볍게, 빠르고 힘 있게, 느리지만 아주 강하게. 랭글러는 오프로드를 무대로 춤을 추듯 능숙하게 몸을 움직였다.
사륜구동 상태에선 방향 회전이 조금 무뎌진다. 회전반경이 늘어나는 것.
구동변환 장치와 더불어 랭글러 언리미티드 루비콘에는 스웨이바와 액슬록 기능이 있다. 스웨이바를 작동하면 서스펜션의 스트로크 허용 범위가 좀 더 확장된다. 노면이 불규칙한 오프로드에서 아주 유용한 장비다.
액슬록 기능은 사륜구동을 좀 더 강력하게 사용하게 해준다. 좌우측 바퀴의 회전 차이를 없애 직결 상태로 만들어주는 것. 디퍼렌셜 기어를 잠그는 것. 앞 뒤 차축을 모두 잠그면 네 바퀴는 25% 씩의 구동력을 확보하게 된다. 헛바퀴 도는 타이어가 있을 때 액슬록 기능을 사용하면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오프로드에선 스웨이바나 액슬록 기능을 사용하지 않아도 움직이는데 아무 문제없다. 아주 거친 길에서, 혹은 길이 아닌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장비다. 무늬만 SUV인 차들이 많지만 랭글러는 이와 같은 오프로드 전용 기능들을 충실하게 갖췄다. 이 차가 뼈 속부터 SUV인 이유다.
시승차에서 만난 또 하나의 반가운 이름, 알파인 오디오다. 90년대 카오디오 업계를 주름잡던 알파인 오디오다. 애프터마켓 튜닝 브랜드로도 유명했다. 소싯적 친구를 다시 본 듯 반갑다. 오디오 볼륨을 적당히 올리면 실내로 파고드는 이런 저런 소음들이 사라진다. 오디오 음질보다 중요한 건 좋아하는 음악이 있느냐다. 40기가바이트 용량의 내장 하드와 가 있어 좋아하는 음악을 장르별로 다 모아 놓아도 용량이 남는다.
까칠하지만 분명한 성격이다. 오프로드에 최적화된 차다. 거칠고 미흡한 부분들이 드러나는 이유다. 예민하지 않은 이들도 이 차를 타면 이런 저런 지적거리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런 부분들로만 시승기 한편을 다 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양한 편의장비, 최고의 정숙성, 공기저항 계수 0.26 정도의 매끈한 디자인, 반자율주행시스템 등을 갖춘 최첨단 SUV라면, 그건 랭글러일 수 없다.
거칠고, 미흡한 부분은 그대로 랭글러의 매력이 된다. 이리 미끌, 저리 뒤뚱 거리며 거친 길을 거슬러 오르는 녀석에게 조금 거친 승차감은 흠이 아니다. 타이어를 묶어버리는 질척한 늪길을 끈기 있게 밀어붙이며 탱크처럼 나아가는 이 차가 조금 시끄럽다고 손가락질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대부분의 다른 차에서는 느끼기 힘든 짜릿한 재미를 랭글러에선 마음껏 느낄 수 있다. 모든 허점을 용서받을 수 있는 이유다. 판매가격 4,790만원.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은퇴하면 랭글러를 타고 싶다. 클래식카 반열에 든 CJ 지프도 좋겠다. 적당히 나이든 그 놈, 지붕도 떼어내고 고향의 구석구석을 유유자적 다녀보고 싶다. 여전히 멋있는 옛 애인을 다시 만난 듯, 병이 다시 도진다. 랭글러, 언젠가는 너를 꼭…….
오종훈의 단도직입
블루투스 페어링은 음성으로만 할 수 있는데 영어로 해야 한다. 한글은 못 알아듣는다. 내비게이션도 없다. 6.5인치 유커넥트 멀티미디어센터는 생각만큼 유용하지 않았다.
9단을 넘어 10단 변속기 등장이 예고되는 시대에 여전히 5단 변속기를 고집하고 있다. 대단한 고집이다. 조용하지도 않다. 바람소리는 크고, 이런 저런 잡소리도 파고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런 불편함, 혹은 문제점들은 아무 문제되지 않는다. 오프로더라는 이 차의 본질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 용서할 수 있다. 랭글러니까.
오종훈 yes@autodia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