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저가 다시 왔다. 6세대 그랜저다. 피터 슈라이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했다는 바로 그 차다. 순해진 모습이다. 앞모습이 그렇다. 각을 찾기 힘들 정도로 부드러워진 모습에서 순둥이의 얼굴을 본다. 폭포수 같은 그릴이라는 설명이지만 글쎄, 웅장하고 장엄한 폭포는 아니다. 대형세단의 무게감, 위엄은 사라졌다. 적어도 앞모습은 그렇다.
옆모습이 최고다. 세단의 정석을 보여준다. 이상적인 비례, 단정하지만 개성 있는 캐릭터 라인이 완성도 높은 모습을 만들어낸다. 딱히 이거다 싶은 요소를 차기 힘들지만 아우 라를 느낀다.
휠 하우스를 감아 도는 라인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볼륨감 있는 모습을 만난다. 숨어있는 매력 포인트다. LED 리어램프 사이를 연결하는 라인, 두 개의 듀얼 머플러가 뒷모습을 구성한다.
86년, 미쓰비시 데보니어의 한국판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왕년의 그랜저는 현대차, 아니 한국 최고의 세단이었다. BMW, 벤츠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시절, 그랜저는 최고의 세단이었다. 지금 그랜저는 대형세단의 끝자락, 준대형에 자리했다. 대형과 중형의 틈새, 조금은 어중간한 자리다. 쏘나타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중형인데, 그랜저는 시간의 흐름을 타고 조금씩 아래로 내려와 대형세단의 길목을 지키고 있다. 지금은 쏘나타와 충돌직전의 자리다. 왕년의 대장이 수문장으로 내려온 셈이다.
실제 이 차의 고객 연령층도 낮아졌다. 30~40대 비중이 전체의 절반가량을 차지한다는 것. 이전 모델보다 7%p 가량 높아졌다고 현대차는 밝혔다. “젊어졌다”는 설명이다.
인테리어는 적당히 고급스럽다. 아주 고급스럽지는 않다는 얘기다. 시트, 대시보드, 지붕 등 구석구석이 짜임새 있게 잘 만들어졌다. 가죽 시트는 부드럽게 몸을 받아준다. 강하게 지지하는 게 아니라, 적당히 물러서며 몸을 받아주는 것.
아날로그 시계는 우측으로 비껴 배치됐다. 중심이 안 맞은 느낌, 조금 어색하다. 그 아래, 정중앙에 자리한 비상등 스위치하고 시계는 자리를 바꾸는 게 어떨지.
손에 착 감기는 버튼 조작감은 아주 우수하다. 치밀하게 잘 짜여진 인테리어는 현대차의 조립 품질이 이미 높은 수준에 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삼성이 인수한 하만 계열의 JBL 오디오가 사용됐다. 삼성과 하만, 그리고 현대차는 또 어떤 콜라보를 선보일까. 앞으로가 궁금해진다. 음량을 살짝 올려 음악을 들으면 결이 살아있는 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서론은 여기까지. 이제 달릴 차례다. 춘천에서 서울까지 약 70여km를 달렸다.
일단 가속. 소리가 좋다. 가속페달을 깊게 밟으면 잘 만져진 소리가 귀를 파고든다. 날카롭지만 거슬리지 않는 소리다. 품위를 지키면서도 적당히 심장을 데워준다. 그 소리에 취해 가속 페달을 놓기가 싫어질 정도다.
스티어링 휠은 2.7회전한다. 스티어링 휠 컬럼에 모터를 장착한 C-MDPS 방식. 일반적으로 중저가 모델에 사용한다는 시스템을 패기 있게 준대형 세단에 장착했다. 준대형 세단이라면 랙에 모터를 장착하는 고급형인 R-MDPS가 어울리지 않을까.
조향 반응은 이전 모델보다 조금 더 예민해졌다. 반응이 빠르고 정확했다. 90도로 좌회전 할 때 조향시스템, 서스펜션, 타이어 등이 조화롭게 반응해 깔끔한 코너링을 느낄 수 있었다. 타이어 비명 없이 잘 돌아나간다. 과격한 조작을 정확하게 잘 받아준다. 서스펜션도 지지해줘 기울어짐을 느끼기 힘들다.
그립을 잃지 않고 딱 붙어서 가는 느낌. 아주 좋았다. 최종적으로 힘을 사용하는 타이어는 245/40R19 사이즈의 미쉐린 타이어. 스페어타이어는 없고 대신 응급조치용 키트를 준비해뒀다.
드라이브 모드에는 스마트 모드가 추가됐다. 일종의 인공지능 버전이다. 평소 운전자의 주행습관을 스스로 학습해서 운전자가 선호하는 패턴으로 차를 세팅한다. 주행모드가 좀 더 똑똑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스마트 센스도 있다. 지능형 안전기술을 이렇게 이름 지었다. 후측방 충돌회피 지원, 자동 긴급제동, 어드밴스드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 어라운드 뷰 모니터, 부주의 운전경보, 스마트 하이빔, 주행 조향보조 시스템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제네시스에 적용된 기술중 고속도로주행 지원 시스템만 빠졌다. 대신 제네시스에는 없는 주행중 후방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기능이 그랜저엔 추가됐다. 주행중 카메라 버튼을 누르면 뒷모습이 모니터에 보인다. 생소한 경험이긴 하지만 빠르게 달리는 상황에서 실제 운전에 어떤 도움을 줄지는 모르겠다.
스마트 센스의 궁극적 목적지는 자율주행이다. 사람이 운전에서 해방되는 게 자율주행이라면, 지금은 손과 발이 제한적으로 자유로운 단계다. 앞으로 눈을 감고도 차가 제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완전한 자율주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향보조 시스템과 어드밴스드 스마트 크루즈컨트롤을 작동시키면 발과 손을 떼고도 차는 잘 움직인다. 차선을 넘지 않고, 앞 차와의 거리를 유지하며, 때로 끼어드는 차가 있어도 안정적으로 거리를 확보했다. 그래도 아주 가끔 차선을 놓칠 때가 있다. 완전히 믿으면 안 된다.
푹신한 그랜저는 더 이상 없다. 6세대 그랜저 IG는 독일 세단에 한걸음 더 가까워졌다. 대형세단의 푹신함은 조금 덜어내고, 허벅지 근육을 좀 더 키워 단단한 하체를 만들었다. 승차감 보다는 주행성능을 좀 더 배려한 하체튜닝이 돋보인다. 조금 소프트한 승차감을 원한다면 구형 그랜저가 낫겠다. 신형은 단단해졌다.
과속방지턱을 느낄 때 느낌이 온다. 한 번에 딱 넘고 난 후 이어지는 잔진동이 없다. 깔끔한 뒷맛. 인상적이다.
정지 상태에서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아 출발하면 살짝 슬립이 일어난다. 가속 후 한 템포 쉬고 탄력을 받는다. rpm 6,500과 5,500 사이에서 공방을 거듭하며 밀고 올라간다. 가볍다. 공차중량 1,640kg에 성인 두 명을 태우고 빠르게 속도를 높인다.
서스펜션은 앞 맥퍼슨, 뒤 멀티링크 조합을 좀 더 튜닝하고 손을 봐서 주행안정감과 고속주행안정성을 개선했다. 앞바퀴굴림이라 뒤가 가벼워서 조금 허전한 느낌을 숨기지는 못했지만, 주행안정감은 제법 높은 수준에서 마무리됐다. 단단한 하체가 몸을 잘 받아준다. 고속에서도 생각보다는 많이 안정된 자세를 보였다.
바람소리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속도가 빠르면 바람소리도 따라서 커지는 법. 특정 속도 구간에서 바람소리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아니라 비껴가는 느낌으로 들렸다. 특이한 느낌이었다.
엔진 회전수를 높이면 변속레버를 통해 미세한 떨림이 전해온다. 무시할 수도, 아쉬울 수도 있는 수준이다. 8단 자동변속기는 266마력의 힘을 훌륭하게 조율해내고 있다. 시속 100km에서 엔진회전수는 1,600까지도 내려온다. 19인치 타이어를 썼을 때 공인 복합 연비는 9.9km/L로 4등급이다.
음성명령 성공률은 100%다. “내비게이션” “라디오” “FM 107.7” 등의 명령에 정확하게 반응했다. 유머도 있다. “사랑해” 했더니 USB에 내장된 음악을 들으라고 틀어준다.
V6 3.0 GDI의 판매가격은 3,550 만~3,870만원 사이. 2.4를 포함한 그랜저 전체는 3,055만~3,870만 원 구간이다. 수입차 견제용으로는 딱 좋은 가격이다. 일본산 중형세단들과 비슷한 가격이고 유럽산으로 건너가면 소형급 차들이 이 가격에 팔린다. 4,000만원 미만에 (준)대형세단을 살 수 있다는 건 대단히 매력적인 제안이다.
조심스럽게 그랜저의 성공을 점쳐본다. 돌발 변수가 없다면 그랜저, 해볼만 하겠다.
걱정은 쏘나타다. 에쿠스 제네시스 아슬란 라인업이 촘촘해지다보니 그랜저가 쏘나타 영역의 일부까지 밀고 내려왔다. 아래로는 이미 아반떼가 치고 올라와 쏘나타의 영역은 위 아래로 잠식되는 중이다.
개별 차종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과 함께 각 모델들의 개성과 특징을 분리해줘야 하는 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빽빽한 차종 라인업은 서로의 영역을 위 아래로 넘어서고 있다. 좀 더 세심한 제품 전략이 필요한 이유다. 현대차의 고민이 크겠다.
오종훈의 단도직입
내비게이션 모니터는 돌출형이다. 벤츠, BMW가 앞서 이런 스타일을 적용하고 있다. 보기 좋을지 모르지만 바람직해 보이진 않는다. 대시보드상의 돌출된 부분은 안전에 위협을 주는 요소여서다.
뒷좌석 가운데는 머리 위 공간이 없다. 센터터널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라 큰 불편이 없지만 머리가 지붕에 닿는다. 좌우로는 지붕을 파놓아 여유 공간을 확보했지만 가운데는 파놓지 않았다. 어른이 앉기엔 안 좋다.
패들 시프트가 없어 아쉽다. 엔진 회전수를 높이며 다이내믹한 운전을 하고 싶은데 손가락이 헛손질 한다. 물론 변속 레버를 통해 수동변속이 가능하지만, 패들이 있다면 좀 더 재미있는 운전을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