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기승을 부린 지난 4일, 인제스피디움의 끓어오를듯한 서킷에 재규어 F-페이스가 섰다.
F-페이스는 재규어의 첫 SUV로 브랜드의 미래를 결정할 모델이다. 세단은 재규어, SUV는 랜드로버로 분명하게 구분된 라인업의 벽을 재규어가 허물었다. 변화무쌍한 시장에 제대로 대응하기가 힘들었던 것일까. 재규어와 랜드로버 각자의 영역을 신사적으로 지키는 대신, 브랜드간 벽을 과감히 허물어버렸다.
약간의 혼란은 감수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날로 확장되는 SUV 시장을 랜드로버에만 맡겨둘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올 1~6월까지 랜드로버의 판매량은 5,502대다. 수입차 시장에서 독일 브랜드와 포드에 이어서 6번째 판매량을 자랑하는 브랜드다. 이에 반해 세단만을 판매하는 재규어는 1,576대에 불과하다. 랜드로버 판매량의 28% 밖에 되지 않는다. SUV 비중이 크게 느는 시장 상황을 잘 보여주는 수치다.
F-페이스는 브랜드 역사상 첫 SUV다. 따지고 보면 많이 늦었다. 포르쉐 카이엔, BMW X, 벤츠 GL, 아우디 Q 등이 이미 오래 전에 SUV 시장에 진입해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다. 이들에 비하면 F 페이스는 조금 늦은 지각생이다.
브랜드 첫 SUV지만 F-페이스가 생초보는 아니다. 랜드로버가 있어서다. SUV의 명가 랜드로버 덕분에 F 페이스는 등판하자마자 강한 존재감을 갖게 됐다. 대통령 후보급 초선의원 정도로 보면 된다. 중량급 신인이다. 등장하자마자 시장의 쟁쟁한 선배들인 BMW X4, 벤츠의 GLC, 포르쉐 마칸 등을 경쟁자로 지목할 정도다.
F-페이스의 탄생은 재규어의 스포츠카 F-타입으로부터 시작된다. 재규어 모델라인업은 경제성의 XE, 스포츠세단 XF, 플래그십 XJ, 그리고 스포츠카 F-타입으로 이루어진다. F-페이스는 그 이름에서 보듯 F-타입의 DNA를 그대로 적용시켰다고 재규어는 말하고 있다. SUV에 스포츠카 성능을 담은 것이 아니라, 스포츠카에 SUV를 적용시켰다는 의미다.
키가 커졌다는 것 빼고는 외형도 F-타입과 비슷하다. 사람의 눈동자와 비슷한 리어 LED는 F-타입을 쏙 빼닮았다. 물론 전면부 사각형의 커다란 그릴부분과 ‘J블레이드’ 시그니처 데이타임 라이트도 비슷하다. 껑충한 키 때문에 F-타입 스포츠카 만큼의 미모는 아니지만 SUV 중에선 제법 섹시한 몸매다.
도어를 열자마자 바로 특이한 부분이 모습을 드러낸다. 윈도를 조작버튼이 도어 상단에 올라가 있다. 오후 내내 오프로드 시승하는 동안 손을 들어올려 창문을 여는 것은 불편했다. 조작버튼을 다른 차량들처럼 위치를 조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실내에는 2개의 스크린이 자리 잡고 있다. 12.3인치의 계기판 클러스터와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10.2인치 인컨트롤 터치 프로라고 불리는 스크린이다. 인컨트롤 터치 스크린을 통해서 거의 모든 차량의 조작이 가능하다.
근래의 프리미엄 모델들은 운전자가 조작할 필수적인 버튼을 제외하곤 전부 터치 스크린으로 집어넣는 추세다. F-페이스도 이런 트렌드를 그대로 반영했다. 재미 있는 그래픽들을 많이 포함시켰다. G포스나 제로백을 위한 타이머 기능, 전후륜 구동력 분배,주행연비, 브레이크와 가속 정도를 보여주는 도표 등 주행을 분석하는 요소를 많이 탑재했다.
SKT의 T맵 지도정보도 8월 하반기부터 만나볼 수 있을 전망이다. 휴대폰을 통해 앱스토어에서 재규어랜드로버 T맵 프로그램을 다운로드 받으면 앞으로 신규로 출시하는 재규어 차량에서 T맵을 손쉽게 이용할 수 있어 더욱 정확하고 빠른 지도 검색이 가능하다.
시승은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져 진행했다. 오전은 인제스피디움에서 짐카나와 트랙주행을 진행했다. 2리터 인제니움 디젤엔진이 탑재된 R-스포트 트림은 다소 높은 차체에서 오는 불안감을 트랙에서 그대로 전해주었다. 3리터 V6 최대출력 300마력, 최대토크 71.4kg.m 성능의 디젤엔진이 탑재된 S트림은 낮은 RPM에서 뿜어져나오는 강력한 토크와 파워에 힘 입어 트랙주행이 훨씬 손쉬웠다. 어댑티브 다이내믹스라는 기능이 있어 빠른 속도로 코너를 공략하기에 훨씬 편했다. 어댑티브 다이내믹스는 AWD차량에 옵션으로 추가되는 장치로 운전자의 스티어링휠을 1초당 최대 500번, 차량의 움직임을 100번 분석하여 최적의 서스펜션 댐퍼 조절을 하게된다. 게다가 코너에서 안쪽 바퀴에 제동을 더해주는 토크 벡터링은 고속회전구간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자신있게 차를 다룰 수 있게 해준다.
오후의 시승은 온로드와 오프로드가 결합된 약 130km의 구간이었다. 오색약수터를 지나서 만해마을까지가는 강원도 설악의 험난한 고갯길이고 이어서 해발 1,100m가 넘는 한석산 정상까지 오프로드를 주행했다. 오후 1시 30분에 출발하여 오후 6시가 넘는 시간까지 주행하는 장시간의 코스였다.
F-페이스가 스포츠카 DNA를 가졌다고 해서 오프로드 주행능력을 우습게 봐선 안된다. F 페이스에는 오프로드 주행을 위해서 일반 크루즈컨트롤과 다른 저속형 크루즈 컨트롤(ASPC: All Surface Progress Control)과 저마찰 발진 기능이 탑재되어 있다. 저속 크루즈 컨트롤은 3.6km/h~30km/h의 속력에서 동작한다. 또 저마찰 발진은 바퀴에 엔진 힘을 서서히 전달하여 미끄럽고 4바퀴 접지가 되지 않는 오프로드 상황에서 최적의 주행 편의를 제공한다. 내리막길에서도 다운힐 브레이킹이 자동으로 동작하여 운전자의 브레이크 페달을 밟는 번거로움을 없애준다. 다만, 저속 크루즈 컨트롤은 설정속도보다 차량의 속도가 줄어들면 따라서 설정속도도 낮아지기 때문에 다시 설정 속도를 올려줘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다양한 도로환경을 모두 F-페이스로 접해보았다. 온로드, 고속도로, 오프로드, 트랙의 상황까지 대부분 접할 모든 도로 조건을 체험해 본 것. 만능은 아니지만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단순히 정속주행만 하는 크루즈 컨트롤은 고속도로에서 아쉬웠다. 프리미엄 차량이라면 앞차의 속도에 따라서 가감속을 하는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정도는 넣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F-페이스는 보다 험난한 오프로드 주행을 위해서 차의 전고를 높이는 에어서스펜션은 탑재하지 않았다. F-페이스는 스포츠카 DNA가 탑재된 SUV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랜드로버와의 제품간 판매간섭을 막기위해 차의 성격을 보다 분명하게 만들어 놓은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규어가 SUV시장에 뛰어든 이상 랜드로버와의 판매간섭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당장 7,260만부터 시작하는 2리터 디젤모델은 6,980만원부터 시작하는 랜드로버의 이보크의 시장을 잠식할 수 있다. 이보크를 보러 왔다가 F 페이스를 구매할 수도, 혹은 그 반대도 가능하겠다. 아무렴 어떤가. 소비자가 F 페이스든 이보크든 둘 중 하나를 사면 재규어랜드로버로선 성공이다. 왼쪽 주머니든 오른쪽 주머니든 내 주머니인 것이니. 주머니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재규어는 한국시장에서 F-페이스를 연간 1,000대를 팔겠다고 말했다. 대단한 의욕이다. 지지부진한 재규어의 판매량을 F 페이스가 얼마만큼 늘려놓을지, 이제 시장을 지켜볼 차례다.
이쯤에서 드는 의문 하나. 랜드로버는 세단 안만드나?
F-페이스의 가격은 7,260만원~1억640만원이다.
김기형 tnkfree@autodia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