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형 세단 시장에 속속 새 선수들이 입장중이다. 이번엔 말리부. 쉐보레의 중형세단 말리부가 신형으로 교체 투입됐다.
출발이 좋다. 4 영업일 만에 6,000대가 계약됐다는 소식이다. 관건은 이 같은 주문 행렬이 얼마나 오래 이어질까의 여부다.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지각변동의 가능성은 크다. 말리부의 면면이 매우 강해졌기 때문이다.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을 출발해 중미산 천문대를 왕복하는 약 120km 구간에서 말리부를 시승했다. 시승차는 2.0 LTZ 트림이다. 짧은 거리, 때마침 내리는 봄비로 충분한 시승이 이뤄지지 않은 부분은 매우 아쉽다.
덩치를 키웠다. 길이는 4,925mm로 이전보다 60mm 늘렸다. 중형 세단 최고의 길이다. 현대차 그랜저보다도 5mm가 길다. 중형이지만 굳이 차급에 얽메이지 않았다. 새로 개발한 아키텍처를 적용한 결과다. 중형이면서 그 윗급, 준대형까지 커버한다는 점에서 세그먼트 파괴자를 자처하는 르노삼성차의 SM6와 흡사하다.
임팔라를 대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 미국에선 훌쩍 커진 말리부를 보고 이 같은 얘기들이 나온다고 전해준 건 한국지엠 관계자였다. 한국지엠 역시 그 가능성을 보고 있다는 의미다. 뷰익 라크로스에도 적용될 예정이라는 신형 아키텍처 도입이 불러올 후폭풍이 생각보다 크겠다.
휠베이스는 무려 93mm가 늘었고 그 덕분에 뒷좌석 무릎 공간은 30mm 정도가 확대됐다. 실제로 앉아본 뒷좌석은 중형급 이상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라디에이터 그릴이 상하로 구분됐고 이를 둘러싼 크롬라인, 양옆으로 자리한 LED 주간주행등, 얇은 헤드램프 등이 구성하는 앞모습은 각 부분이 따로 논다. 하나로 통합된 느낌이 덜하다. 차체 측면에 달아놓은 말리부라는 이름표는 어색하다. 컨티넨탈이 공급하는 19인치 타이어가 적용됐다.
실내는 제법 신경을 많이 썼다. 시트와 대시보드 소재의 질감이 우수했고 크롬 라인, 나무 장식 등을 더해 고급스럽게 꾸몄다. 2.6 회전하는 핸들은 저항감을 느끼기 힘든 수준으로 가볍게 돌아갔다.
1.5 엔진은 창원에서 공급하고 2.0 엔진은 미국에서 들여온다. 2.0에 터보를 얹은 엔진은 무려 253마력이 힘을 뽑아낸다. 다운사이징의 정수를 보여준다.
숫자로는 엄청난 파워를 자랑하지만 실주행에서 느끼는 엔진은 차분한 편이었다. 공차중량 1,470kg으로 마력당 무게비가 5.8kg에 불과하다. 이 정도면 6초대에 시속 100km에 도달할만한 성능이다. 스포츠카 못지않은 성능을 보일 잠재력을 가진 것.
하지만 실제 주행에서 이 같은 고성능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엔진 소리도 잔잔했고 가속반응도 폭발적이라기보다는 힘 있게 꾸준히 속도를 올렸다. 스포츠카와도 잘 맞을 엔진이지만 중형 세단에선 또 그에 맞추는 여유를 본다. 가진 자의 여유다. 비가 오는 날씨여서 습기가 많은 공기가 마치 젖은 장작처럼, 터보의 성능을 어느 정도 끌어내린 측면도 있다.
중형 세단은 숙명적으로 ‘무난함’을 요구받는다. 강력한 힘보다 안정감 있는 주행이 더 중요한 세그먼트여서다. 중형세단은 가족이 함께 타는 차, 즉 패밀리세단으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능도 디자인도 무난한 게 미덕이다. 그런면에서 말리부의 253마력은 조금 과한 측면이 있다. 아이와 함께 잔디밭에서 뒹굴며 놀아주는 힘 센 아빠같다. 있는 힘을 마음껏 쓰기보다 적절한 수준에서 통제된 힘을 보여준다. 당연하다. 중형세단, 패밀리카니까.
그때문일까. 말리부는 운전모드를 따로 제안하지 않는다. 노멀 스포츠 에코 모드가 따로 없다. 그냥 운전자가 묵묵히 달리면 된다. 가속페달의 깊이에 따라 차가 반응할 뿐이다. 적극적으로 운전을 즐기는 이에겐 아쉬운 대목이겠지만 평범한 많은 운전자에겐 이런 방식이 더 편할 수 있다. 미디엄이냐 레어냐 귀찮게 묻고 따지지 않고 그냥 알아서 내주는 식당이 편안한 이치와 같다.
유명산 와인딩로드를 제대로 달려보지는 못했다. 비가 내렸고 정상 부근엔 안개가 시야를 막기도 했다. 그래도 제법 높은 속도로 코너를 몇차례 공략할 수는 있었다. 차가 흔들리거나 미끄러질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끄러운 길에서도 잘 버텨줬다. 마른 노면이었다면 훨씬 더 나은 코너링을 기대할 수 있었겠다.
엔진 소리는 조용했다. 심지어 고속주행을 이어가며 5,000~6,000rpm을 넘나드는 중에도 ‘멀리서 들리는 작은 소리’ 정도로 들릴 뿐이다. 253마력의 고성능을 가진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참 착한 고성능이다.
한국지엠 보령공장에서 공급하는 3세대 6단 자동변속기는 관심의 대상이다. ‘보령 미션’이라 불리며 그동안 많은 지적을 받아온 전력이 있어서다. 주행중 변속은 부드러웠고 변속지연이나 불안정한 떨림 등을 느끼지 못했다.
미국에선 말리부 2.0 엔진에 일본 아이신이 공급하는 8단 변속기가 올라간다. 도심 주행이 많은 한국 지형에 8단 변속기를 적용하면 가감속 스트레스가 많아 비효율적이라고 한국지엠의 개발자가 설명했다. 6단 변속기를 최적화 했다는 설명이다. 향후 8단변속기 적용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그럴 일 없다”고 선을 그었다.
신형 말리부는 17개의 각종 센서, 8개의 에어백을 가졌다. 중형세단 최고 수준의 안전장비다.
지능형 어댑티브 크루즈컨트롤은 정해진 속도 안에서 차간거리를 유지하며 달린다. 차간 거리는 3단계로 구분한다. 차선 이탈 및 차선 유지 보조 시스템은 비 때문에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비가 내려 카메라가 차선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구간이 많았던 탓이다.
전방 충돌 경고 시스템은 확실하게 작동했다. 앞 차와 거리가 아주 가까웠을 때 계기판에 빨간등이 점등되며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긴급자동제동 시스템이 있어서 이런 상황에서 운전자가 아무 대응을 하지 않거나 느슨하게 브레이크를 밟으면 차가 스스로 브레이크를 작동시켜 사고 가능성을 낮춘다. 보행자 감지 및 제동 시스템도 있다. 말리부에는 이밖에도 모두 11개의 첨단 기술을 통해 안전과 편의를 제공한다고 한국지엠은 밝히고 있다.
애플 카플레이도 있다. 아이폰과 연동해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즐길 수 있는 것. 내비게이션 모니터는 화질이 매우 선명해 한 눈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슬쩍 스쳐보기만해도 잘 보인다. 센터 콘솔 바로 앞에는 핸드폰이 쏙 들어가는 포켓이 있다. 무선충전 시스템도 그 안에 있다. 무선충전은 둘째치고 차 안에서 이리 저리 굴러다니던 핸드폰이 제집을 찾았다. 굿 아이디어다.
19인치 타이어를 장착한 2.0 터보의 연비는 10.8km/L다. 4등급. 1.5 엔진은 13.0km/L다. 말리부 판매가격은 1.5 터보 모델이 2,310만원부터다. 시승 모델인 2.0 LTZ 프리미엄 팩은 3,180만원.
신형 아키텍처의 엄청난 가능성에 비해 무난한 성능은 의외였다. 하지만 중형 시장에선 그 무난함이 가장 큰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다. 새로운 플랫폼은 앞으로 많은 차에 적용될 지엠의 훌륭한 자산이다. 뒷좌석의 넓은 공간은 아이들이 다 큰 다음에도 충분히 여유가 있겠다. 첨단 기술의 지원을 받는 안전 및 편의장비는 차에 대한 신뢰성을 담보하고 있다.
오종훈의 단도직입
변속레버의 위치, 토글 스위치의 작동방식은 거슬렸다. 변속레버는 너무 앞으로 치우쳤다. 편하게 잡으려면 조금 뒤로 빼는 게 좋을 듯하다. 레버 위에 자리한 토글 스위치를 작동시키려면 변속레버를 옆으로 쥐고 엄지 손가락을 사용해야 한다. 어색하고 불편한 자세가 된다. 이를 사용하는 소비자들이 많지 않고, 이 같은 세팅이 GM 본사의 방향이기도 하다는 해명을 들었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이를 사용하는 소비자들이 많지 않다면 이 기능을 빼는 게 맞겠고, 어쨌거나 토글 스위치를 장착한다면 편하고 기능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옳은 방향이다.
오종훈 yes@autodia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