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단이다. 바둑도, 정치도, 심지어 태권도도 고수는 9단이다. 정치도 9단을 최고로 친다. 김영삼과 김대중 두 전 대통령이 정치 9단으로 불렸다. 10단은 신의 영역,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9단이 있다.
9단 변속기를 단 차, 레인지로버 이보크를 만났다. 지난 10월 국내 소개된 페이스리프트 모델이다. 시승차는 레인지로버 이보크 TD4 HSE다. 이놈, 고수일까.
랜드로버는 넓게는 유럽을, 좁게는 영국을 대표하는 SUV 명가다. SUV에 대한 관심이 높지 않았던 시절부터 오프로드에 특화된 명차들을 만들어온 브랜드다. 전 세계의 오지를 찾아다니며 레인지로버 디스커버리로 달리는 카멜 트로피는 어느 누구도 흉내 내지 못했던, 랜드로버만이 할 수 있는 이벤트였다. 그만큼 역사와 전통을 가진 명문가다. 그중에서도 레인지로버 뱃지는 최고의 SUV임을 말해주는 보증수표다.
작다. 그리고 비싸다. 길이 4,370mm에 2.0 디젤 엔진을 심장으로 얹은 작은 차. 가격이 7,420만원이다. 심지어 스포티지나 코란도C보다 작은데 가격은 3배쯤 비싸다.
이보크는 역시 디자인이 압권이다. 성능도 성능이지만 작은 차에 디자인적인 아름다움을 잘 새겨 놓은 아이코닉한 모델이다.
작은데 실내 공간은 그리 좁은 줄 모르겠다. 뒷좌석도 딱 맞는 공간을 확보했다. 휠베이스를 2,660mm로 쫙 벌려놓은 덕분이다.
예쁘다. 날렵하게 쫙 빠진 몸매가 확 눈에 꽂혀 들어온다. 안 그래도 예쁜 모습에 빨간색 컬러를 적용했다. 도로 위를 달리는 많은 차들 중 단연 빛을 발한다. 멋지다.
시동을 걸면 변속레버에 해당하는 드라이브 셀렉트가 조용히 솟아오르며 모습을 드러낸다. 2.0 디젤 엔진이다. 재규어 XE에 사용된 인제니움 엔진이다. 재규어 랜드로버가 새로 개발한 신형엔진으로 엔진 전체를 알루미늄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가볍다. 정밀한 연료 분사 제어 장치를 적용해서 효율도 높다. 180 마력. 마력당 무게 비를 계산을 해보면 10.7kg 정도다. 메이커 발표에 따르면 9.0초만에 시속 100km에 도달한다.
시트는 폭넓게 운전자를 받아 준다. 꽉 조이지 않고 신축성이 좋은 쟈켓을 닮았다. 느슨하게 몸을 지탱해주다가 코너에서는 확실하게 지지해준다. 시트포지션이 높아 멀리 볼 수 있고 앉은 자세도 편하다. 불쾌한 흔들림은 느끼기 힘들다.
스티어링휠은 촉감이 좋다. 2.3회전한다. 핸들 아래로 패들 시프트가 있다. 왼쪽은 시프트 다운, 오른쪽은 시프트 업이다.
차가 멈추면 엔진은 정확히 꺼졌다. 조건이 맞으면 어김없이 엔진은 잠시 가수면 상태에 접어든다. 엔진 스톱 시스템은 정확하게 작동했다.
크루즈컨트롤은 정해진 속도로 달리는 기본적인 수준이다. 차간거리를 인식하고 스스로 조절하는 어댑티브 크루즈는 아니다.
오디오 시스템은 풍부한 음감을 들려준다. 음질이 고급스럽다. 소리조차 고급이다. 메리디안 사운드 시스템이 17개의 스피커를 통해 들려주는 소리다. 그 많은 스피커가 이 작은 차 곳곳에 숨겨져 있다.
가속은 아주 가볍다. 공차중량 1,920kg. 승차인원을 포함해 2톤에 달하는 만만찮은 무게지만 아무런 부담 없이 속도를 높인다. 어떤 속도에서도 빠르게 원하는 만큼 빠르게 가속을 마친다. 거침없이 쭉 뻗어나가는 가속은 경이롭다.
9단 이보크. 이보크에는 9단 자동변속기가 적용됐다. 후진까지 무려 열 개의 기어가 180마력 43.9kgm의 힘을 조율한다. 부드럽다. 만만치 않은 힘이 부드럽게 드러난다. 강한 자의 부드러움이다. 부드러운데 강하고 강한데 부드럽다. 상반된 반응이 한 몸에서 어우러진다. 고수의 동작을 닮았다.
주행환경에 최적화된 기어를 선택해 성능과 효율을 조화롭게 담아낸다. 강한 구동력을 뽑아내는 1단, 물 위를 사사삭 날아가는 9단. 그 사이에서 다양한 힘을 만들어낸다. 9단 변속기는 독일 변속기 전문 메이커 ZF가 만들었다. 시속 100km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기어는 4단부터 9단까지다. 그 사이에서 다양한 형태의 힘을 만들어낸다.
오프로드에선 다른 유사 SUV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레인지로버의 진가는 오프로드에서 빛나는 법. 거친 길에 올라서도 여유있게 움직인다. 험로주행 성능은 단연 최고다. 오프로드 주행이 길거리 난투극이라면 온로드 주행은 스피디하게 펼쳐지는 액션씬. 이보크는 난투극이든 액션씬이든 거침없이 소화해 낸다. 말끔하게 생겼지만 싸울 일이 생기면 확실하게 상대를 제압하는, 천상 싸움꾼의 면모를 가졌다. 야무진 펀치를 가진 꼬마 신사다.
소음 진동 그리고 잡소리(NVH)는 잘 걸러냈다. 실내는 조용했고, 속도를 높이면 바람 소리 정도가 들릴 뿐이다. 타이어 구름, 노면 잡소리 등은 실내로 파고들지 못한다. 바람소리조차 걸러내고 남은 정도가 실내로 들어오는 수준.
D모드에서 시속 100km에 맞추면 rpm은 1600을 유지한다. 수동변속을 이용해 9단을 택하면 1,400rpm까지 떨어진다. 대단한 안정감을 맛본다. 4단으로 낮추면 4,000rpm까지 회전수가 올라간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100km/h와 있는 힘껏 밀어붙이는 100km/h는 그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운전자는 그 사이에서 원하는 힘을 택하면 된다.
고속주행에서도 엔진 소리는 그리 자극적이지 않다. 이불로 덮어놓은 소리가 난다. 무턱대고 소리를 지르는, 찢어지고 자극적인 소리가 아니다. 잘 다듬어진 소리다. 소리에서도 신경을 많이 썼다. 소리에서 고급감을 느낀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은은한 파워를 전해주는 소리다.
파노라마 글래스 루프는 시원하다. 탁 트인 하늘을 차 안에서 마주하면 답답한 마음도 확 트인다. 지붕이 열리지는 않지만 상관없다. 지붕이 열리는 선루프보다 안 열리는 파노라마 글래스 루프가 개인적으로는 더 좋다.
핸들은 2.3 회전 한다. 핸들을 돌리면 휙휙 돌아가는 아주 타이트한 조향이다. 온로드에 좀 더 잘 맞는 세팅이다. 오프로드에선 이렇게 예민한 조향보다 느슨하고 유격이 있는 조향이 어울린다. 이 차 타고 오프로드를 거침없이 주행할 수는 있지만, 그러기엔 너무 고급이다.
코너에서는 탁월한 안정감이 빛난다. 단단하게 노면을 붙들고 4륜구동인 내 바퀴가 깔끔하게 코너링을 마무리한다. 회전할 때 안쪽 바퀴에 살짝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토크벡터링도 한 몫을 한다. 조금 빠르게 진입해도 깔끔하게 탈출한다. 즐겁다.
작아도 고급일 수 있음을 이보크는 증명해 보였다. 레인지로버 뱃지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이보크는 충분히 고급스러웠다. 실내외 디자인, 차를 구성하는 재질은 물론 움직이는 동안 보여주는 동작 하나 하나가 고급스러웠다. 고수답다.
복합연비 13.8km/L. 2톤 넘는 무게임에도 식욕은 최소한이다. 조금 먹고 큰 힘을 쓰니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작다고 우습게 볼 일은 아니다. 또한 작다고 프리미엄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이보크를 보면 안다.
오종훈의 단도직입
핸들을 몸에 맞게 조절하는 틸트& 텔레스코픽 기능은 수동이다. 뻑뻑한 레버를 젖힌 뒤 핸들을 잡고 상하좌우로 맞춰야 한다. 불편하고 힘들다. 전동식이면 좋겠다. 프리미엄 SUV 아닌가.
버튼은 직관적이지 않다. 전자동지형반응시스템은 좌우 화살표 버튼를 조절해 필요한 주행모드를 활성화시킨다. 하지만 손가락은 자꾸 해당 기능을 표현한 그림을 누른다. 그림은 이해를 돕기 위한 표시일 뿐 버튼이 아니다. 직관적으로 버튼을 사용할 수 있게 좀 더 고민할 필요가 있겠다.
오종훈 yes@autodia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