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르타 모터쇼’를 보기 위해 인도네시아를 다녀왔다.

인도네시아는 2억 5,000만명의 인구에 2013년 기준 1인당 GDP 3,475달러로 후진국에 해당하는 경제수준이지만 연간 자동차 판매대수가 120만대에 이를만큼 자동차 시장은 크다. 앞으로 발전 가능성은 더 크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시장에 한국 자동차 브랜드는 찾아보기 힘들다. 모터쇼 현장에서도 현대차와 기아차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차의 존재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현장이었다.

DSC09310

현지 자동차시장은 일본차 일색이다. 92%의 점유율을 차지한다. 도로에 물결치는 자동차들은 온통 토요타, 다이하츠, 혼다, 마츠다 등 일본차 뿐이다. 한국차는 존재하지 않는다고해도 과언이 아닌 곳. 한국차의 시장 점유율은 2% 정도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인도네시아는 한때 한국의 자동차 산업, 특히 기아자동차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인도네시아 국민차사업으로 기아차의 세피아가 결정됐었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동남아 시장 교두보를 확보하겠다는 의지가 불탔던 시절이 있었다.

김선홍 회장이 이끌던 기아차는 1993년 인도네시아 국민차 사업권을 따낸다. 당시 인도네시아의 집권자였던 수하르토 대통령의 3남 후토모 만델라 푸트라와 합작사업을 통해 얻어낸 쾌거였다. 기아차의 1.5리터급 세단 세피아를 인도네시아 국민차로 결정하고 수입관세를 면제받는 특혜를 얻어낸 것. ‘토미’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후토모 만델라 푸트라는 1995년 열린 제1회 서울모터쇼에 인도네시아 참관단을 대거 이끌고 방한해 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기자는 그 현장을 직접 취재한 바 있다.

국민차 사업권을 따낸 기아차는 자본금 1억달러인 기아티모르자동차(KTM)을 설립하고 인도네시아 치캄팩 공단에 22만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건평 2만 1,000평, 연산 7만대 규모의 공장 건립에도 나섰다.

하지만 현지 시장을 장악한 일본 업체들이 거센 반발에 나서면서 사업은 위기를 맞는다. 일본 메이커들이 기아차에만 특혜를 주는 것은 부당하다며 국제무역기구 WTO에 제소한다. 미국 업체들도 일본 업체들을 거들고 나섰다.

경제상황도 도와주지 않았다. 1997년 한국 보다 먼저 IMF 위기가 인도네시아를 덮쳤다. 현지의 자동차 판매는 30% 이상 곤두박질 쳤다. 98년 WTO는 기아차에만 국민차 특혜를 주는 것은 부당하다는 결정을 내렸고 이에따라 기아차의 인도네시아 국민차 사업권은 취소되고 만다. 1999년 수하르토 정권이 몰락한다. 이로써 기아차의 인도네시아 국민차 사업은 완전히 물건너 갔고 동남아 시장 교두보 확보라는 기대도 사라져 버렸다.

2000년에는 기아차를 인수한 현대차 정몽구 회장이 인도네시아 와히드 대통령과 만나 기아차의 인도네시아 사업을 계속해서 진행하겠다는 의지를 밝히지만  와히드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나면서 이 또한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티모르 프로젝트 좌절로 기아차는 결국 부도에 몰리게 됐고 한국은 IMF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 인도네시아에서의 기회는 빠르게 위기로 변했고 국가적 재난상태에까지 이르게 된 것.

1997년 한국의 IMF 위기는 기아차의 부도 사태로 시작된다. 이제와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기아차가 인도네시아 국민차 사업을 차질없이 진행했다면, 기아차의 부도는 없었을 것이고 한국에는 IMF 사태가 오지 않았거나 그 시기가 늦어지고 형태도 달랐을 것이다.

기아차의 티모르 프로젝트 좌절로 한국의 자동차산업이 동남아 시장에 진출하고 주도권을 쥘 수 있었던 절호의 찬스는 사라져 버렸다. 아쉽고도 아쉬운 일이다.

자카르타=오종훈 yes@autodia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