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아우토반. 두 대의 차가 나란히 달린다. 호쾌한 질주. 포르쉐 911의 운전자가 차창을 내리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포르쉐도 인정한 그 차, 엘란트라의 광고였다. 다소 무리한 설정이라는 지적이 있었지만 어쨌든 엘란트라는 고성능을 강조한 이 광고 이후 판매가 크게 늘었다. 엘란트라는 1992년과 1993년 국내 최다판매 차종이었다.
엘란트라의 광고는 단정하고 우아한 디자인을 강조하던 자동차 광고가 DOHC 엔진을 앞세워 ‘성능’을 강조하는 추세로 전환하는 터닝 포인트를 이뤘다. 대우자동차의 에스페로가 ‘지상비행’이라는 카피를 내세우며 고성능을 강조하는 광고를 선보인 것도 이 즈음이었다.
엘란트라가 첫 선을 보인 것은 1990년 10월 26일, 삼성동 한국종합전시장이었다. 1.5 GLi, 1.5 GLSi, 1.6 DOHC 세 종류의 트림으로 가격은 각각 649만원, 721만원, 799만원이었다. 지금은 준중형으로 분류되지만 당시에는 중소형승용차였다. 엘란트라는 이탈리아의 조르제토 쥬지아로와 결별하고 현대차가 스스로의 힘으로 개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엘란트라의 후속모델인 아반떼는 1995년 3월 17일 코엑스에서 출시했다. 정세영 회장과 전성원 사장이 직접 나서 차를 설명했다. 아반떼는 1.5와 1.8 엔진을 장착하면서 준중형 시장에 이른바 ‘쩜팔’ 엔진 시대를 열었다. 가격은 780만원부터 850만원까지.
아반떼는 일부 해외시장에서 엘란트라 혹은 란트라라는 이름으로 판매를 이어갔다. 현대차의 준중형 세단이 엘란트라와 아반떼라는 이름으로 섞이며 국내외에서 활약을 이어간 것이다. 아반떼는 출시 첫날 3,699대, 5일 만에 1만대 계약을 올리며 당시로서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준중형’을 강조한 전략이 주효했다는 분석이었다.
아반떼에는 현대차가 독자개발한 1.5 알파엔진과 1.8 베타엔진이 올라갔다. 엘란트라 독자개발에 이어 자동차의 심장인 엔진까지 차근차근 개발해 나가는 현대차의 역사가 아반떼에 그대로 녹아있는 셈이다.
초기 아반떼는 고려청자의 우아한 곡선을 응용한 볼륨감 있는 디자인에 라디에이터 그릴을 생략한 디자인으로 주목을 끌었다. 일부 자동차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공기 유입 구멍을 뚫어 라디에이터 그릴을 만드는 튜닝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공기유입량을 늘려 엔진 냉각 효과를 조금이라도 더 높이려는 시도였다.
아반떼가 출시한 지 1년이 지난 96년 8월에는 PC 통신 하이텔에 아반떼 동호회가 생겼다. 그만큼 아반떼의 인기가 높았음을 반증하는 일이다.
스치듯 지나간 두 개의 모델이 있다. 아반떼 린번과 투어링이다.
98년 5월 출시된 아반떼 린번은 리터당 16.9km의 연비를 자랑하며 한번 주유로 서울-부산을 왕복할 수 있는 모델이었다. 가솔린 엔진이면서 획기적인 수준으로 연비를 향상시킨 아반떼 린번은 이후 현대차 엔진 기술 발전에 토대를 마련했다.
‘왜건은 안 된다’는 통념에 정면 도전한 모델이 아반떼 투어링이다. 아반떼 투어링은 한국에서 금기의 영역이던 왜건 스타일을 과감히 도입하며 고군분투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이후 i30과 i40 등으로 현대차의 왜건 명맥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으며 해외 시장에서는 제법 많은 사랑을 받는 모델로 자리 잡고 있다.
99년 3월, 현대차는 아반떼 2000년형을 선보이며 전 모델에 에어백 기본 장착을 결정한다. ABS에 이어 에어백이 기본장착되면서 준중형차의 안전도가 크게 높아지는 계기가 된다.
2000년 4월 18일 아반떼 XD가 데뷔한다. 3세대 모델이다. 데뷔 무대는 울산공장. ‘작은 그랜저’를 표방하며 고급스러운 디자인을 선보였다. 아반떼XD는 1500㏄급 알파엔진(108마력)과 2000㏄급 베타엔진(147마력)을 적용하고 유해가스 차단장치와 실내 습기제거 장치, 풀오토 에어컨, 내비게이션 시스템 등 당시로서는 첨단 장치를 갖췄다. DOHC 엔진을 기본으로 1.5 GL, 1.5 GLS, 1.5 디럭스, 2.0 골드 등 4개 트림으로 라인업을 구성했고 가격은 814만원부터 1,055만원까지로 책정됐다.
엔트리모델을 제외한 전 트림에 ABS를 기본 채택해 화제가 됐던 차다.
이 시기 현대차는 ‘품질 경영’이 화두였다. 품질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미국 등 해외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판단에서였다. 당시 현대차 임직원들은 담당 분야에서 품질문제가 발생할 경우 책임을 지겠다는 각서까지 쓰고 신차개발에 나섰다. 까다로운 품질 관리 때문에 아반떼 XD는 최종 단계에서 품질문제를 보완하느라 당초 예정보다 2개월 여 늦게 출시되기도 했다. 아반떼 XD는 그렇게 개발된 차였다.
그래서였을까. 아반떼 역사상 품질이 월등히 개선된 차가 XD였다. 훨씬 단단해진 하체는 이전 모델에 비해 안정감 있는 주행성능을 확보하고 전체적인 완성도를 높이며 준중형세단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4세대 모델인 아반떼 HD는 2006년 4월 27일 부산모터쇼에서 출시됐다. 알파엔진에 이어 현대차가 개발한 1.6 감마 가솔린 엔진을 얹었고 텔레매틱스 시스템인 모젠을 적용했다. 커튼식 에어백이 이때 처음 아반떼에 장착되기도 했다.
아반떼 HD는 사실 미국에서 먼저 데뷔했다. 국내 출시보다 앞선 4월 13일 개막한 뉴욕모터쇼에서 베일을 벗은 것. 부산모터쇼가 뉴욕모터쇼보다 늦게 열리는 일정 때문에 빚어진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해외시장 비중이 급격히 커지던 시기에 국내 우선을 고집할 수 없었던 상황을 보여준다는 분석도 있다.
아반떼 HD는 연간 판매량이 70만대까지 올라가며 월드 베스트셀링카로 올라선다.
2009년 7월 선보인 아반떼 LPi 하이브리드는 최초의 국산 하이브리드카로 주목을 끌었다. LPi 엔진을 기반으로 한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이후 현대차 친환경 기술 개발에 초석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0년 8월 출시한 아반떼 MD는 현대차의 디자인철학 ‘플루이딕 스컬프처’를 기반으로 예술적인 디자인으로 만들어졌다. 1.6 가솔린 직분사 엔진에서 뿜어지는 140마력의 힘을 바탕으로 중형세단 못지않은 성능을 확보했다. 4단 자동변속기 시대를 마감하고 6단자동변속기로 교체해 더욱 정교한 운전이 가능해졌다. 북미 시장에는 1.8 누우엔진이 장착됐다. 5세대 아반떼MD는 수출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전체 판매량의 73%가 나라 밖에서 팔릴 정도다.
그런 아반떼가 이제 곧 누적 판매량 1,000만대를 넘긴다는 소식이다. 지난 8월말, 현대차 아반떼의 글로벌 누적판매량은 987만대. 매달 8만대 가량 팔리는 추세를 감안하면 10월중 1,000만대를 돌파할 것이 확실해 보인다. 연평균 41만대, 매일 1140대씩 팔린 셈이다.
1990년 엘란트라 출시 이후 24년 만에 이룩하는 금자탑이다. 세계적으로 단일모델 누적판매 1,000만대를 넘긴 차는 10여종에 불과하다. 메이커별로 살펴보면 토요타, 포드, GM, 폭스바겐, 혼다 정도가 한 차종으로 1,000만대 판매를 넘겼을 뿐이다. 이제 현대차가 그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깡통을 두드려 차를 만들기 시작했고 해외 메이커와의 기술제휴로 걸음마를 시작했던 한국자동차산업이 이제 단일모델 1,000만대 판매 기록을 세웠다. 세계 자동차시장의 주역으로 우뚝 섰음을 아반떼가 증명하고 있다. 대단한 일이다.
현대차가 엘란트라를 출시하던 1990년, 기자는 자동차잡지사에 입사해 자동차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엘란트라에서 아반떼로 이어지는 24년 동안의 기록이 더욱 애틋하고 대견한 이유다.
아반떼가 기특하다.
오종훈 yes@autodia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