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숨결로 나를 데우며” 

신영복 선생의 명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첫 제목을 이렇게 달고 있다. 차가운 감옥, 온기를 느낄 데라고는 내 몸, 입김 하얀 내 숨결 밖에 없는 공간을 신영복 선생은 그렇게 얘기하고 있다.

뜬금없이 그 표현이 생각난 건 그랜저 하이브리드를 타던 중이었다. 브레이크를 통해 에너지를 다시 활용하는 그림을 보면서 그 말이 생각났다. 하이브리드 차는 제 몸에서 나온 에너지를 다시 거둬들인다. 아주 작은 온기조차 아쉬운 감방에서처럼 한 방울의 에너지를 허투루 쓰지 않음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현대자동차가 지난 연말 그랜저 하이브리드를 투입했다. 아반떼에서 시작된 하이브리드 차종이 쏘나타를 거쳐 그랜저까지로 이어지고 있다. 하이브리드 모델이 점차 고급차종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

친환경자동차의 강세는 이제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다. 자동차 제조사의 이미지 메이킹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저탄소협력금제가 시행되면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차, 즉 연비가 나쁜 차는 설 자리가 좁아진다. 하이브리드 차종과 디젤 엔진 차들이 좀 더 유리한 입장이 되는 것이다. 하이브리드 라인업이 확장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쏘나타와 그랜저에 디젤 엔진이 적용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배기량이 큰 가솔린 엔진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게

한 때 현대차의 최고급 모델이었던 그랜저의 입지는 이제 과거와 다르다. 에쿠스와 제네시스에 그 자리를 내주고 이제는 현대차 대형 세단 라인업의 막내가 되고 말았다. 그랜저가 최고급 모델 시절이었을 때의 쏘나타 정도 위상이 지금 그랜저의 자리라고 보면 된다. 최고급 세단이라기보다는 고급 패밀리 세단 정도가 이 차에 어울리는 수식어다.

안정적인 비례를 가진 그랜저의 디자인은 편안하고 세련돼 보인다. 헤드램프는 제법 날카롭게 만들어졌지만 직선을 찾기 힘든 모습으로 부드럽고 친근한 분위기를 만든다. 차체 측면에 새겨진 ‘블루 드라이브’, 그리고 뒷면에 자리한 하이브리드 표시가 이 차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계기판에는 rpm 게이지가 사라졌고 4.6 인치 LCD 클러스터를 통해 다양한 정보가 제공된다. 경제운전, 보통 운전, 비경제운전으로 나누고 운전자의 패턴을 알려준다. 경제운전을 잘 하면 에코레벨이 올라간다. 이 레벨을 조금이라도 올려보려고 노력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경제운전을 하게 된다. 재미와 효율을 잘 묶어 놓은 셈이다. 하이브리드 자동차에서만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재미다. 빠르게 달리고, 좁은 코너를 빠르게 돌고, 다이내믹하게 달리는 재미를 만끽하는 지금까지의 ‘펀 투 드라이브(fun to drive)’와는 또 다른 ‘지루한 즐거움’이다.

모니터에 에너지 흐름이 보이게 해 놓으면 운전자는 자신도 모르게 경제운전에 몰입하게 된다.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더 아끼려고 노력하게 된다. 에너지 흐름이 눈에 보이는데 안 그럴 도리가 없다.

센터페시아와 센터 콘솔 커버에는 첨단 사양의 노트북 재질같은 알루마이트 그레이 느낌을 줬다. 조금 더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센터페시아를 앞으로 쭉 빼내 조작하게 편하게 했고 그 뒤쪽으로 숨어있는 작은 수납공간을 만들었다.

길이 4,910mm 너비 1,860mm, 높이 1,470mm. 편안한 실내 공간을 제공하는 크기다. 뒷좌석에서도 여유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자녀들이 다 큰 중년 가장이 필요한 공간을 넉넉하게 갖췄다. 앞바퀴굴림이라 뒷좌석 바닥 공간을 차지하는 센터 터널도 없다. 뒷좌석에도 열선이 내장돼 있어 추운 겨울 엉덩이를 따뜻하게 할 수 있다.

‘시동을 건다’는 표현보다 ‘스위치를 켠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엔진이 반응하는 게 아니라 계기판의 바늘이 ‘ready’를 가리키면서 움직일 준비가 됐음을 알린다. 배터리가 충분히 충전되어 있다면 처음에는 전기차처럼 배터리로 움직인다. 엔진 소리를 내지 않고 스르르 움직이는 차를 운전할 때에는 늘 경이로움을 느낀다.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경이로움이다.

가속페달을 밟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엔진이 살아난다. 잘 훈련된 아이처럼 거칠지 않은 얌전한 엔진이다. 세타(θ) II 2.4 MPI엔진과 모터의 조합으로 이 차는 움직인다. 엔진출력 159마력, 모터출력 35kW를 합해 204마력의 힘을 낸다. 6단 자동변속기가 이 힘을 조율해 앞바퀴로 보낸다. 공차중량은 1,680kg으로 마력당 무게비가 7.9kg이다.

핸들은 정확하게 3회전한다. 무난한 조향비다. 주행중 핸들을 돌려보면 의외로 빠르게 머리를 돌린다. 편안한 승차감을 보여주지만 마냥 무른 것만도 아니다. 속도를 높이면 그런대로 단단한 하체가 안정감 있게 버텨준다. 강하게 몰아치면 숨어있던 탄탄한 성능이 드러난다.

가속페달의 킥다운 버튼은 저항이 크지 않아 가볍게 밟을 수 있다. 부담 없는 일탈을 즐기는데 딱 좋은 페달이다. 브레이크 페달은 밟는 느낌이 여느 차들과 다르다. 조금 더 빵빵한 고무풍선을 밟는 느낌이랄까. 아주 미묘한 차이지만 페달을 밟는 오른발이 어색해 하는 순간이 있었다.

고속주행을 무난하게 소화해냈다. 바람소리에 묻혀 함께 들리는 엔진 사운드는 폭이 좁다. 노래를 잘 부를 것 같은 소리는 아니다.

그랜저 하이브리드는 부드럽게 다뤄야 제 맛을 느끼게 된다. 있는 듯 없는 듯 잔잔하게 흐르는 재즈 선율과 잘 어울리는 차다. 부드럽게 터치하며 가볍게 장난치듯 다루면 크지 않은 몸짓으로 반응하며 아기자기한 재미를 전한다.

엔진소리도 바람소리도 들리는 듯 마는 듯한 속도로 달리며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무심코 바라보며 편안하게 달릴 때가 가장 좋다. C 필러의 조각 창으로 바깥 경치를 내다보는 맛이 일품이다.

타이어는 한국타이어 옵티모로 225/ 55R17 사이즈다. 회전저항계수 3등급, 젖은 노면 제동력 지수 3등급에 해당한다. 스페어타이어는 생략했고 대신 응급 키트를 마련해 두었다.

차선이탈 경보장치는 운전자의 주의를 촉구하는 데 한 몫을 한다. 방향지시등을 조작하지 않고 차선을 넘어가면 어김없이 경고음이 울린다. 크루즈컨트롤 시스템은 말 그대로 정속주행 기능만 한다. 차간 거리를 조절하며 제동까지 해주는 어댑티브 기능은 없다.

상향등을 자동으로 제어해주는 오토 하이빔, 주차할 때 차의 사방을 한 눈에 보여주는 어라운드 뷰 모니터 등은 운전에 대한 스트레스를 줄여준다. 무릎 에어백을 포함해 모두 9개의 에어백이 충돌시 탑승객을 지켜준다.

내비게이션은 똑똑하다. 실시간 도로정보를 알려준다. 진행 방향에 사고나 정체구간이 있으면 우회로를 택할 것인지 묻는다.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으면 정체구간 알림을 받을 수 없다. 똑똑한 내비게이션을 제대로 즐기려면 아는 길이어도 목적지를 정한 뒤 운행하는 게 좋겠다. 위성 신호가 안 잡히는 터널 안에서도 내비게이션은 500m 전방에 카메라가 있다고 알려준다.

메이커가 발표한 그랜저 하이브리드의 복합연비는 1등급에 해당하는 16.0km/L로 도심 15.4, 고속도로 16.7km/L다. 200km 가까이 달리는 동안 연비는 13.0km/L를 보였다. 상당 구간을 거칠게 달렸고 도심 구간 운행이 많았던 점을 고려하면 나쁘지 않은 연비다. 조금 신경 써서 운행한다면 메이커가 말하는 복합연비를 일반인들도 경험할 수 있겠다.

그랜저 하이브리드는 한 가지 트림으로 운용된다. 판매가격은 3,460만원. 그랜저 HG 300보다는 비싸고 HG330보다 싸다. 현대차는 하이브리드 전용 부품에 대해 10년간 20만Km 무상 보증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밖에 1년 75%, 2년 68%, 3년 62%로 중고차 가격을 보장해주는 중고차 가격 보장 서비스, 30일 이내 하이브리드 불만족 시 다른 차량으로 교환해주는 차종교환 프로그램, 구입 후 1년 이내 사고 발생 시 신차로 교환해주는 신차교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파격적으로 밀어주는 셈이다. 소비자 입장에선 나쁠 게 없는 조건이다.

오종훈의 단도직입

도어패널 앞쪽에 만들어놓은 시트조절 레버는 위치가 잘못됐다. 너무 멀다. 벤츠와 비슷한 형태로 만들었는데 시트를 조절하려면 몸을 바짝 세워야 한다. 시트에 몸을 편안히 밀착 시킨 채로는 시트 조절을 할 수 없다. 특히 시트를 뒤로 누일 때에는 더 그렇다. 시트조절 레버는 그냥 시트 아래에 있는 게 제일 편하다.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돌릴 때에는 핸들에 붙은 버튼이 가끔 걸린다. 이럴 땐 볼륨이 갑자기 커지거나 오디오 모드가 바뀌게 된다. 위 아래로 미는 방식 이어서다. 그 높이를 조금 낮추던지 누르는 버튼으로 바꾸는 게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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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승 오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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