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수입차 시장에서 볼보는 벌써 몇 년째 조용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중국 메이커인 지리가 볼보를 인수한 이후 국내에서 볼보의 존재감은 예전만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한때 잘 나갔던 집안, 그러나 지금은 자기 집 내주고 월세 사는 처지와 다르지 않다. 절치부심 재기를 노리고 있겠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하루가 다르게 확대되는 수입차 시장을 그저 바라만보고 있어야 하는 입장도 그리 편치는 않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지난 8월, 볼보는 페이스 리프트 모델 3차종을 한데 묶어 강남의 한 전시장에서 조용히 발표했다. 그중 한 차종인 S80 D5신형 모델을 시승했다.
볼보 S80은 볼보의 플래그십 세단이다. 평범한 외모는 그저 그런 차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지만 그 안에는 놀라운 안전기능이 숨겨져 있다. 안전에 관한한 양보하지 않는 볼보답게 다른 차에서는 만나기 힘든 기능들이 하나도 아닌 여러 종류가 탑재돼 있다. 안전의 볼보라는 이름이 허명이 아님을 보여주는 기능들이다. 과거 볼보의 안전이 튼튼한 차제를 통해 얻어지는 하드웨어적인 것이었다면 지금은 첨단 센서와 카메라, 컴퓨터 시스템을 통해 적극적으로 사고를 막는 수준에 올라와 있다.
자전거 감지 시스템(Cyclist Detection with full auto brake), 보행자 충돌 방지 시스템, 시티 세이프티 기능들이 그것이다. 자전거 감지 시스템은 자동차 전면 그릴에 장착된 광각 듀얼 모드 레이더와 전면 유리 상단부에 있는 고해상도 카메라, 그리고 중앙제어장치를 통해 작동된다. 카메라를 통해 확보된 영상을 분석하고 추돌이 예상되는 긴급 상황에서 운전자가 적절한 반응을 하지 않으면 자동차 자체의 시스템에 의해 브레이크를 작동시킨다.
보행자 충돌 방지 시스템(Pedestrian Detection With Full Auto Brake)은 주간 35km/h 이내의 저속 주행 시 차량 전방에 보행자가 근접하여 사고가 예측되면 운전자에게 경고음과 경고등으로 1차 경고를 한 뒤 적절한 시간 안에 운전자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차가 스스로 멈춘다. 속도를 늦출 뿐 아니라 완전 정지가 가능하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시티 세이프티 Ⅱ (City Safety Ⅱ)는 시속 50km 이하 주행 중, 앞 차의 급정거 등으로 전방 차량과의 간격이 좁혀져 추돌 위험이 있는데도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작동하지 않으면 시티 세이프티 기능이 스스로 브레이크를 작동시킨다. 앞 차와의 속도차이가 15km/h이하일 경우 추돌 없이 차량을 정지시키며 그 이상의 속도 차이가 나면 추돌이 발생할 수 있으나 추돌 전 속도를 낮추므로 피해를 최소화한다.
과거 몇 차례 트랙 테스트를 통해 이를 경험한 바가 있었지만 실제로 차를 타고 도로 상에서 이 같은 상황을 연출해 기능을 테스트할 수는 없었다. 시스템이 작동할 때까지 기다릴 만큼 강심장을 갖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시스템을 통해 차가 스스로 속도를 조절하는 맛을 볼 수는 있다. 시속 80km로 설정하고 정속주행을 하면 앞차와의 거리에 따라 속도를 조절한다. 중간에 차가 끼어들 때 마치 자석의 같은 극끼리 서로를 밀어내는 것 같은 느낌으로 앞차를 밀어내듯 속도를 스스로 줄인다. 30km/h에서 200km/h 사이에서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이 작동 한다.
시속 30km 미만에서는 큐 어시스트가 작동한다. 앞차와 간격을 유지하며 움직이다가 차가 멈춰야 하는 상황에서는 완전히 멈추는 것. 3초 이내에 앞차가 출발하면 S80도 스스로 다시 출발한다. 3초가 넘어가면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컨트롤하면 된다.
S80이라면 가속페달을 밟을 필요 없이 핸들만 조절하며 달릴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브레이크는 차가 알아서 밟아준다는 말이다. 카메라와 센서를 이용해 차의 속도를 조절하고, 보행자나 자전거 탄 사람 등을 인식하고 완전 정지까지 가능케 해주는 기술을 실차에 적용한 예는 볼보가 유일하다. 적어도 이 분야에 대해선 가장 앞선 메이커인 셈이다.
이 정도 기술에 올라서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지난 2010년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기자들을 스웨덴 예테보리에 모아놓고 시티세이프티 기능을 시연하던 중 차가 멈추지 않고 그대로 충돌했던 일도 있다. 전 세계 언론이 지켜보는 앞에서 큰 망신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접시를 깨는 법이다. ‘안전의 볼보’라는 명성은 그런 우여곡절에도 굴하지 않고 노력한 결과로 얻은 값진 열매다.
볼보의 안전장치는 이 밖에도 많다. ‘사각지대 정보 시스템(BLIS: 사이드 미러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좌우 사각지대로 진입하는 차들을 감지하여 운전자에게 경고)’과 ‘다이내믹 스태빌리티 트랙션 컨트롤(DSTC: 자이로스코프 센서가 차량의 방향, 조향 핸들의 움직임, 그리고 실제 차량 휠의 회전과 비교해 미끄러짐이 예상되면 엔진 출력을 감소시키거나 하나의 바퀴 또는 여러 개의 바퀴에 제동을 걸어 접지력을 향상시켜 미끄러짐을 방지)’, ‘액티브 벤딩 라이트(ABL: 스티어링 휠을 돌리는 방향으로 라이트가 양방향으로 최대 15˚까지 회전하는 기능)’, 액티브 하이빔(AHB: 도로 주행 중 전방 또는 맞은편 차량의 빛을 감지하여 상향등을 하향등으로 자동 조정)’, ‘차선이탈 경고 시스템(LDW: 디지털 카메라가 주행 방향을 확인해 졸음운전 등으로 정상적인 주행 궤도를 넘어서는 운전 패턴이 감지되면 운전자에게 경고음으로 환기)’, ‘경추 보호 시스템(WHIPS: 후방 추돌 사고 시 앞좌석 등받이가 뒤로 이동하여 경추 부상을 최소화하는 시스템)’, ‘측면 보호 시스템(SIPS: 측면 충돌 시 발생한 충격을 차량 바디가 흡수하여 차량 내부의 변형을 방지, 커튼형 에어백 및 사이드 에어백과 상호 연동)’ 등을 갖추고 있다.볼보 S80은 사고를 미연에 막는 장치에 더해 사고가 났을 때 승객을 최대한 보호할 수 있는 장치들을 가장 많이 갖춘 차라고 할 수 있다.
볼보의 플래그십 모델이라고는 하지만 S80은 화려하거나 최고급 사양으로 무장한 프리미엄 럭셔리 세단과는 거리가 있다. 경쟁 브랜드의 중형급 모델들과 비교되는 차다. 거리를 달리는 차들에 섞여 있으면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 라디에이터 그릴 앞에 붙여진 볼보의 엠블럼, 그리고 뒤에 달린 볼보라는 글씨 정도가 이 차의 존재감을 부각 시키는 요소다.
플래그십답게 실내는 고급이다. 가죽과 나무의 조합은 고급차의 인테리어 공식. 센터페시아의 버튼들은 잘 정돈됐고 송풍구 스위치는 직관적이다. 센터 페시아 안쪽으로 숨은 공간은 볼보의 특징. 플레그십카에는 안 어울리는 앞바퀴굴림 방식이지만 덕분에 뒷좌석에 센터터널을 없앨 수 있어 더 넓은 뒷좌석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블루투스를 이용해 핸드폰에 저장된 노래를 즐기며 본격적인 시승에 나섰다. 블루투스를 이용하면 전화도 핸즈프리로 받을 수 있다.
가죽 핸들은 손에 착 감긴다. 완전히 감으면 정확하게 3회전한다. 직렬 5기통 디젤엔진을 가로 배치했고 앞바퀴가 구동한다. 최고출력 215마력은 4,000rpm에서 발휘된다. 눈여겨 볼 부분은 최대 토크다. 44.9kgm의 토크가 1,500~3,000rpm에서 나온다.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하면 즉시 최대토크가 나온다는 의미다. 일상적인 운전에서 3,000rpm 이상을 쓰는 경우도 그리 많지 않은 만큼 차가 움직이는 동안 최대토크가 발휘되는 셈이다. 44.9kgm의 굵고 강한 토크감을 늘 만날 수 있다는 말이다. 디젤 엔진이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다.
자동 6단 변속기는 1,600rpm 정도에서 시속 100km를 만들어낸다. 엔진회전수가 낮아 차는 안정되고 조용했다. 시속 150km를 넘기면서 바람소리가 커진다. 시속 100km 전후의 일상주행 속도에서는 엔진소리와 바람소리가 적절히 섞이는 잔잔한 상태를 유지한다. 단단한 서스펜션은 피렐리가 만든 245/40R18 사이즈 타이어의 그립력과 어울려 수준 이상의 승차감을 보인다.
컴포트, 스포츠, 어드벤스드 등 주행모드에 따라 계기판이 연동돼 변하고 주행상태도 조금씩 미묘한 변화를 보인다. 스포츠카처럼 힘 있게 달리는가하면 조금 더 느슨하고 편안하게 여유 있는 발걸음을 옮길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차이는 크지 않다. 푹신한 편안함이 아니다.
가속페달을 완전히 밟으면 마지막 순간에 킥다운이 느껴진다. 밋밋하게 바닥까지 밟히는 페달보다는 이처럼 킥다운 버튼이 있는 게 운전하는 즐거움을 준다. 이제부터 제대로 달린다는 신호를 보내는 포인트다.
핸들에는 패들 시프트가 있어 변속을 위해 손을 뗄 필요가 없다. 왼쪽이 시프트다운, 오른쪽이 시프트 업이다. 시프트다운을 걸면 엔진이 금세 예민해지면서 치솟는 힘이 전달된다. 시프트업을 하면 팽팽했던 긴장이 풀리며 얌전해지는 엔진을 느낄 수 있다.
메이커가 발표한 이 차의 복합연비는 14.2km/L. 판매가격 6,100만원이다.
볼보 S80은 저평가된 기대주다. 비슷한 가격대의 경쟁모델들이 갖지 못한 첨단 안전장비들은 가격을 떠나 안전에 집착하는 소비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는 소비자라면 눈여겨 볼만한 차라고 할 수 있다.
오종훈의 단도직입
들고 다니는 백팩을 조수석에 올려놓았는데 안전벨트를 매라는 경고등과 경고음이 울린다. 노트북과 DSLR 카메라 정도가 들어있는 가방이다. 가방 때문에 이런 경우를 만나는 건 처음이다. 가방과 사람은 구분해줘야 한다.
실내 지붕 끝선은 여전히 틈새가 벌어져 있다. 벌써 몇 년째 볼보를 만날 때마다 확인하는 부분이고 확인 할 때마다 실망하는 부분이다. 이 틈새 제발 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
시승 / 오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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