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 서 있을 법한 차 한 대가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에 세워졌다. 포르쉐 911 1세대 모델이다. 실제로 이 차는 포르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차로 911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전 세계를 도는 중이다. 1967년식으로 쉰 살을 바라보는 나이다. 911이 처음 등장했던 63년에 한국에선 3륜차인 기아 T-1500이 출시됐고 시승한 차가 만들어졌던 67년에 한국에선 현대차가 출범했다.

50년. 지금은 7세대 모델이 출시됐으니 사람으로 치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쯤 되는 어마어마한 고령이다. 할아버지 911에 몸을 싣고 아주 잠깐 평창의 고즈넉한 길을 여유롭게 달렸다.

원래는 901이라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푸조가 한발 앞서 가운데 0이 들어가는 형식으로 차 이름을 짓게됐고 포르쉐는 결국 911이라는 이름을 택해야 했다.

뒤로 움츠린 개구리의 모습. 덩치도 크지 않아 6세대 911과 함께 서면 작은 사이즈가 확연히 드러난다. 2+2 시트로 뒷시트는 간이 시트 정도로 보면 된다. 911의 디자인 정체성은 1세대부터 지금까지 살아있다. 1세대부터 6세대까지를 관통하는 디자인은 경이롭다. ‘역사란 이런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디자인과 함께 911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요소들이 있다. 리어엔진 리어 드라이브, 수평대향 박서 엔진이 그것이다. 이중 하나라도 없다면 911일 수 없다. 50년이라는 세월 동안 세대를 이어가며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왔지만 자신의 정체성만큼은 한 치 양보 없이 지켜왔다. 변화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이처럼 분명하게 자신의 DNA를 간직하고 지키는 차도 드물다.

1967년식 1세대 911은 지금 노구를 이끌고 전 세계를 돌고 있다. 독일 스위스 미국 영국 일본 중국 등의 국기가 새겨진 나라들이다. 태극기는 없다. 당초 예정에는 없었다는 말이다. 다행히 중간에 급히 여정을 변경해 한국을 일정에 추가했다. 한국에서 일정을 마치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개구리눈처럼 동그란 두 개의 헤드램프 사이에는 트렁크가 자리했다. 보닛을 열면 빈 공간이 넓게 자리했다. 생각보다 넓다. 사이드미러는 좌측에만 한 개가 있다. 조수석 시야는 운전자가 직접 고개를 돌려 확인해야 한다.

도어를 열고 시트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 시트 아래 스프링이 출렁이며 몸을 받는다. 근육이 빠진 노인의 앙상한 팔에 안기는 느낌. 무거운 몸이 미안해진다. 헤드레스트는 조수석에만 있다. 대신 안전띠는 운전석에만 있다.

시동키는 왼쪽에 있다. 포르쉐의 전통이다. 계기판은 다섯 개의 원으로 구성됐다. 한 가운데는 rpm 게이지가 자리했다. 낯선 공간 속에서 만나는 익숙한 배치다.
속도계의 적산 거리계에는 ‘72729’라는 숫자가 있다. 단위는 마일이다. 11만6,000km를 넘기는 거리다. 50년 동안 달린 거리로는 너무 짧다. 그동안 고이 모셔온 차임을 말해준다. 핸들 오른쪽에 라디오 박스가 자리했다.

가속페달을 깊게 밟은 채로 시동키를 한참 돌리고 있어야 그야말로 가쁜 숨을 겨우겨우 몰아쉬며 부르릉 시동이 걸린다. 나이를 속일 수는 없는 법. 하지만 일단 시동이 걸리고 나면 믿기 힘들만큼 정정한 기력을 과시한다. 방구소리는 요란하고 발걸음은 가볍다.

직경이 큰 우드 핸들은 얇았다. 당연히 파워핸들이 아니다. 유턴을 할 때 생각만큼 차가 돌아서지 않을 때의 당혹감이란…….
클러치와 브레이크, 그리고 가속 페달을 밟을 때에는 발이 허공에 떠 있게 된다. 가벼운 마음으로 클러치 페달에 밟을 올리는 데 생각보다 더 큰 힘이 필요했다. 기어 레버를 누른 뒤 뒤로 당겨야 1단에 물린다.
수동 4단 변속기는 각단이 아무 이상 없이 제대로 작동하며 수평대향 엔진에서 만들어내는 130마력의 힘을 조율했다.

가속하기가 조심스럽다. 으스러져버릴 것 같아서다. 하지만 웬걸. 보무도 당당한 발걸음은 3,000rpm 이상 가속도 너끈히 받아낸다. 속도를 올리면 허술한 창틈으로 바람이 파고들고 나이를 짐작케 하는 엔진소리는 배경음악처럼 뒤에서 들린다.

놀라울 만큼 잘 달렸다. 고속도로에 올려도 충분히 잘 달리겠다는 생각이 든다. 제원표상의 최고속도는 210km/h. 배기가스에 섞인 가솔린 냄새를 휘날리며 달리는 911은 낯설고 신기했다. 이런 저런 장치들을 작동하는 게 낯설었다. 전시용에나 어울릴 것 같은 차가 가속페달을 밟자 슬금슬금 움직이는 게 신기했다. 불안 불안하게 출발했지만 흐뭇하게 달렸다. 대견하다. 아니 존경스럽다.

50년의 세월을 지나 한국 땅에서 이 차를 만난 감격, 그리고 직접 핸들을 잡아 달려봤다는 감동. 그 다음 가슴 아릿하게 밀려드는 짠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 늙은 노인의 앙상한 가슴에 안긴 듯한 애잔함. 운전석에서 내려 다시 차를 바라보는 동안 만감이 교차한다.

시승/사진 오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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