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밸리. 이름부터 살벌하다. 죽음의 계곡.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유명 관광지이지만 자동차 마니아들에게는 자동차 혹서기 테스트코스로 더 유명한 곳이다. 미국 출장길에 벼르고 별러 데스밸리에 다녀왔다.

데스밸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혹한 기후환경을 가진 곳 중 하나다. 여름철 기온이 섭씨 49도를 넘나들고 최고기온이 57도까지 치솟았던 기록이 있다. 이처럼 높은 기온에 연평균 강수량은 59mm에 불과한 사막지대다. 데스밸리는 또한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곳이다. 바다 표면보다도 80m 이상 더 내려간 곳. 생명이 살아남기 힘든, 그래서 이름조차 죽음의 계곡이다.

이 같은 가혹한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는 데스밸리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최적의 자동차 시험 장소로 꼽힌다. 개발 중인 자동차가 어느 정도의 더위까지 견딜 수 있는지 테스트하기에 데스밸리는 최고의 조건을 갖췄다. 관광객의 발길 조차 끊기는 6, 7, 8월의 데스밸리에 세계 유명 메이커들이 개발중인 신차들이 곳곳에서 출몰하는 이유다.

한 여름에 데스밸리에 들어서는 것은 말 그대로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들어섰다가 오가는 차도 없는 곳에서 차가 고장이라도 나는 날에는 심각한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 한여름의 더위가 지난, 하지만 여전히 더운 11월의 데스밸리를 찾았다.

파트너는 랭글러 루비콘이다. 가솔린 3.6 엔진을 얹어 284마력의 힘을 내는 4도어 소프트탑 모델. 한국에선 2,776cc 디젤 엔진 모델이 팔리지만 미국에선 가솔린 엔진이 주력이다. 미시건에서 막 출고한 따끈따끈한 새 차를 라스베가스 공항에서 만났다. 사막을 건너는 여행자에게 이 보다 더 좋은 파트너는 없다. 깍두기 트레드를 가진 튼튼한 네발과 높은 시야, 거침없는 힘과 험로탈출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모두 갖춘 정통 오프로더다. 게다가 조금 야한 듯 하지만 사막에 정말 잘 어울리는 오렌지 컬러로 꽃단장까지 한 랭글러였다. 녀석은 데스밸리의 천적임을 여행기간 내내 증명해 보였다.

서부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황량한 사막지대는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라스베가스에서 북서쪽으로 200여 km를 달려 데스밸리 입구에 닿았다. 기분 좋게 오픈탑으로 이동했지만 사막의 먼지를 다 마실 수는 없는 일, 데스벨리에선 지붕을 씌워야 했다.

190번 도로를 타고 접어든 11월의 데스밸리는 쾌적했다. 그래도 더웠지만 움직일만했고 건조한 날씨에 땀조차 흐르지 않았다. 그 옛날 서부로 향하던 이들이 물을 찾았지만 짠 맛 때문에 도저히 마실 수 없어 ‘베드 워터’라고 이름 지어진 곳에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병풍처럼 그곳을 에워싸며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은 산의 8부 능선에 해수면 표시가 있다. 그 아래로는 바닷물보다도 낮은 지역이다. 해발 -86m. 지구상 가장 낮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데스밸리 곳곳의 지명은 낭만적이다. 태양의 기울기에 따라 형형색색 다른 빛을 발한다는 ‘아티스트 팔레트’ ‘악마의 골프코스’ ‘머스터드 캐년’ ‘레인보우 캐년’ 등등. 사막 한 가운데 쭉 뻗은 포장도로는 때로 이리 저리 굽이치며 여행자의 눈앞에 장관을 펼쳐 보인다.

길을 벗어나고픈 유혹은 컸다. 하지만 위험했다. 또한 국립공원 지역이어서 출입이 금지된 곳들이 대부분이어서 아무 곳이나 들어섰다가는 단속될 수도 있었다. 이방인이 쉽게 다가설 수 있는 곳은 포장도로 밖에 없었다.

이럴 땐,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게 최상이다. 랭글러 십여 대가 서있는 곳, 렌터카 사무실에서 안전하게 투어할 수 있는 오프로드 코스를 추천받았다. 데스밸리의 렌터카 사무실엔 랭글러 밖에 없었다. 여행자가 랭글러를 타고 서너 시간 가량 둘러볼 수 있는 오프로드 코스를 물어보고 에코캐년을 추천받았다. 차량 출입이 허락된 코스중 비교적 무난한 길이었다.

제대로 된 안내판조차 없는 진입로를 겨우 찾아 랭글러의 가속페달을 밟았다. 랭글러는 네바퀴굴림으로 자세를 바꿨다. 사막이라기보다 잡목이 우거진 황무지였다. 카우보이를 태운 말이 달리듯 랭글러는 흙먼지를 날리며 에코캐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멀리 배경으로 서 있던 산들에 점차 가까이 다가섰고 그 품 안에 살포시 안겨들며 본격적인 협곡 여행이 시작됐다. 관목지대가 끝나고 바람이 깎아놓은 기묘한 형상의 절벽이 양 옆으로 포진한 사이로 랭글러가 파고들기 시작했다. 앞에도 뒤에도 랭글러 말고 움직이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곧게 뻗은 길은 이제 구불거리는 산길로 변했다. 구비를 돌아설 때마다 비경이 펼쳐진다. 산 아래 협곡을 따라 달리다보면 저 산 위로 인디언들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든다. 자갈길은 때로 부드러운 흙길로 변했다. 차를 멈췄다가 출발하면 바닥이 푹푹 패인다.

경사가 심한 바위 위로 차를 올렸다. 이대로 올라가면 하늘에 닿을 것 같은 길. 운전석에서 느끼는 위압감은 컸다. 가속페달을 조금씩 조금씩 작동하며 랭글러를 살살 달래가며 바윗길을 올랐다. 오프로드에서 랭글러의 움직임은 영민했다. 타이어가 밀릴 법도 한데 야무지게 바위를 잡아채며 차를 위로 밀어 올린다. 페달을 터치하는 만큼 서서히 밀고 올라가는 기분을 느껴보면 랭글러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 랭글러가 미국에서 만들어진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2차 대전 와중에서 군수용으로 처음 지프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전쟁이 아니었어도 이런 환경에서라면 지프를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메리칸 오프로더의 대표선수를 꼽으라면 단연 랭글러다.

거친 길에서 속도를 올리며 빠르게 달렸다. 자잘한 진동이 전해져 오지만 큰 쇼크는 없다. 랭글러는 비교적 안정된 자세를 시종일관 유지했다.

자연이 보여주는 장대하고 때로 아기자기한 풍광에 취해 정신없이 달렸다. 돌아서야 할 시간. 먼 길을 날아온 이방인들의 일탈을 멈춰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차를 돌렸다. 달려온 길을 되밟아 돌아나가는 시간, USB에 담아온 버스커 버스커의 주옥같은 노래들이 랭글러의 스피커를 타고 에코 캐년에 메아리 쳤다.

한참을 덜컹거리며 되돌아 나와 다시 포장도로에 올라서는 순간, 긴 여행을 마치고 집에 온 듯 편안함이 몰려온다. 아스팔트 길이 이처럼 편한 것인지 새삼스럽다. 한바탕 일탈 후에 느끼는 일상의 고마움이란.

데스밸리에도 생명은 살아 숨 쉰다. 전갈, 뱀, 거미 등이 데스밸리에는 많다. 데스벨리 안내책자에 나와 있는 뱀에 물렸을 때의 대처법 첫 문장이 끝내준다. “조용히 있어라(Stay calm)”. 이어지는 설명은 이렇다. “FDA에 따르면 미국에서 연간 8,000명이 독사에 물리지만 단지 9~15명만이 죽는다” 결국 요란 떨지 말고 닥치고 있으라는 얘기로 들린다. 당황하지 말라는 얘기다. 물린 부위를 깨끗이 씻고 심장보다 낮게 위치시키고 반지, 시계, 꽉 끼이는 옷을 벗고 즉시 병원을 찾으라는 설명은 그 뒤에 이어진다.

데스밸리에서 차량으로 이동할 때에는 반드시 충분한 물을 휴대해야 한다. 데스밸리 전체가 국립공원인만큼 정해진 도로 이외의 지역에 진입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돼 있다. 데스밸리 자체가 너비 6~25km, 길이 220km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인만큼 제대로 보려면 최소한 2~3일은 잡아야 한다.

미국 데스밸리=오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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