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9이 시동을 걸었다. 신차발표회를 마치고 강원도 양양으로 무대를 옮겨 미디어 시승회를 열었다. 동원된 차만 40여대. 차값만 대략 30여억 원에 이른다. 기아차가 KH라는 프로젝트 명으로 4년 넘는 기간을 준비해 드디어 세상에 탄생을 고한 K9이다. K9의 최고급 버전인 3.8 모델을 타고 강원도 양양에서 망상까지 시원하게 달렸다.

5m가 넘지만 그렇게 커 보이지 않는다. 초대형 세단이라고 하지만 위압적이지 않다. 슬림하고 겸손한 모습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구구절절한 디자인 평가는 생략한다. 각자 의견에 따라 보이는 대로 느끼고 평가할 일이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은 BMW 5 시리즈와 많이 비슷하다는 것. 기아차의 디자인을 책임지는 피터 슈라이어 부사장도 “칭찬으로 알겠다”며 인정했다.

휠베이스 3,045mm는 경이롭다. 대형 세단에서 리무진을 제외하면 가장 긴 휠베이스다. 차의 안정감, 실내 공간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게 바로 휠베이스. 초대형 세단의 면모를 갖추는데 큰 도움이 된다. 당연히 실내공간은 여유롭다. 뒷좌석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도 공간이 남는다. 조수석 시트를 앞으로 밀어서 접으면 발을 쭉 뻗을 수도 있다. 후륜구동차지만 뒷좌석 공간을 좌우로 나누는 센터터널이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시동을 걸었다. 앞 창 아래에 언 듯 보이던 물기가 스르르 사라진다. 오토 디포그 기능이다. 엔진은 호흡을 시작했지만 미동도 없는 실내. 최고급세단에서 느낄 수 있는 아늑함이 느껴진다. 공차중량 1,910kg의 거구가 미끄러지듯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움직임이 가볍다.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최고출력 334마력, 최대토크 40.3kgm. 넘치는 힘이다. 여기에 자동 8단 변속기가 궁합을 이루며 부드럽고 강하게 차를 컨트롤한다.

시속 100km에서 rpm은 1600에 머문다. 3.8 리터의 엔진과 8단 변속기가 낮은 회전수에서도 일상 주행에 충분한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남는 힘들을 어디다 써야할지 모르겠다.

가속페달을 바닥에 붙였다. 속도계가 가로로 눕기까지는 오래지 않았다. 놀라운 건 안정감이다. 핸들을 잡은 운전자가 느끼는 불안감이 크지 않다. 가속페달을 밟을 때 전해지는 엔진 소리도 잘 다듬었다. 폭발적인 힘이지만 소리는 부드럽다. 두꺼운 이불 속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아득하게 들린다. 탄력이 붙어 고속주행에 접어들면 엔진소리는 바람소리에 파묻힌다. 속도에 비해 바람소리도 큰 편은 아니다. 정돈된 소리다.

후륜구동. 밀고 나가는 힘과 차분하게 가라앉는 차체가 묘한 조화를 이룬다. 서스펜션은 무르다. 소프트한 서스펜션이 포근한 승차감을 만든다. 단단한 성능보다 말랑한 승차감을 우선하는 선택이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하드한 서스펜션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핸들은 2.7 회전한다. 3회전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 조향성능은 정교하고 조금은 예민한 편이라 할 수 있다. 반경이 좁은 인터체인지를 빠른 속도로 돌아나가는데 무리가 없다. 5m가 넘는 차체가 부담스럽지 않을까 걱정됐지만 기우였다. 편안하게 코너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스포츠 모드를 택하면 핸들이 무거워진다. 안정감 있고 확실한 스티어링 조작을 위한 반응이다. 제동은 확실하다. 고속에서 속도를 줄이기 위해 브레이크에 발을 올리면 안정감 있게 속도를 줄인다. 70-80km/h 정도의 속도에서 급제동을 하면 정확하게 멈춘다. 노즈 다이브도 심하지 않다. 앞이 숙여진다기보다 수평으로 가라앉는 느낌이다.

K9은 종합선물세트다. 적용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망라했다. 어드밴스드 스마트 쿠르즈컨트롤, 헤드업 디스플레이, 차선이탈 경보장치, 어댑티브 풀 LED 헤드램프, 후측방 경보시스템, 아웃사이드 미러 경고등, 주행모드 통합제어시스템, 차량 통합제어시스템(AVSM), 전자식 변속레버, 어라운드 뷰 모니터링 시스템, IT를 접목한 첨단 텔레매틱스 시스템인 UVO 시스템,스티어링휠 햅틱 리모컨 등등의 기술이 차의 곳곳에 배치돼 있다. 화려한 기술들은 기아차의 의욕을 보여준다. 세계적인 대형세단들과 견줘 밀리지 않는 성능과 편의장치를 갖추고 싶었던 것이다.

K9에 적용된 하나하나의 기술들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수준보다 진일보했다. 헤드업 디스플레이는 풀 컬러에 입체 이미지까지 구현했고, 차선이탈 경보는 시트 진동을 좌우로 구분해 어느 쪽 차선으로 이탈하는지를 몸이 느낄 수 있게 했다. 하이빔은 자동으로 조절되고 헤드램프 조사각도는 차의 속도에 맞춰 변화한다. 핸들을 쥔 채로 햅틱 리모컨을 조절해 필요한 정보를 확인하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세계적인 대형세단들과 비교해 굳이 없는 기술을 찾으라면 밤길에 시야를 확보해주는 나이트 비전 정도다. 기술의 완성도도 떨어지지 않는다. 운전석에 앉으면 기아차가 작심하고 첨단 기술들을 받아들였음이 실감난다. 운전석을 감싼 공간에 자리한 수많은 버튼들 때문이다. 무려 100개 가까운 버튼들이 주인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풍부한 기능이 좋기는 하지만 그 많은 버튼들을 보면 ‘과잉’이 아닐까하는 걱정도 생긴다.

K9 3.8의 연비는 새 연비 기준으로 9.3km/L다. 3.3은 9.6km/L. 판매가격은 3.3 모델의 경우 프레스티지 5,290만원, 노블레스 5,890만원, 노블레스 스페셜 6,400만원이다. 3.8 모델은 프레스티지 6,340만원, 프레스티지 스페셜 6,850만원, 노블레스 7,230만원, 노블레스 스페셜 7,730만원, 프레지던트 8,640만원이다.

겁 없는 K9이다. 경쟁모델로 벤츠 S 클래스와 BMW 7시리즈를 언급했다. 제품 프리젠테이션에서 매 항목마다 S 클래스와 7시리즈와의 비교를 빼놓지 않았다. 출력, 연비, 편의장치, 제품 구성 등등에서 이들과 비교해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K9을 앞세워 수입차 시장에 공격하겠다는 발언도 나왔다. 수입차의 공세에 대응한다는 게 아니라 수입차 시장을 공격하겠다는 것. 도발적이다.

무리다. 어쩌면 무모한 도전이다. 7시리즈와 S 클래스가 경쟁 상대라는 얘기가 나올 때, 몇몇 기자가 쿡쿡 거리며 웃음을 터트린 건 당연한 일이다. 7과 S 가 아니라 E와 5라고 해도 웃었을 것이다. 택도 없는 얘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무모한 도전이야말로 값진 일이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일을 이뤄내야 비로소 성공할 수 있다.신화의 시작은 무모한 도전에서 부터다.실패한다해도 값진 실패다. 실패를 통해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배움을 얻을 수 있어서다. 불과 몇 년 전에 현대기아차의 오늘을 예견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K9의 겁 없는 도전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도전이 성공할 확률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지만 도전한다는 그 자체는 높이 평가한다. “붙어봐! 깨지더라도”

오종훈의 단도직입복잡한 계기판은 압권이다. 12.3인치 풀사이즈 TFT-LCD 계기판에는 수많은 정보가 올라온다. 대형 계기판이지만 하나하나 정보를 찾아보기 어렵다. 수많은 기술들을 의욕적으로 담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좀 더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센터페시아의 버튼들은 조금씩 유격이 있다. 손을 갖다 대고 살짝 흔들면 버튼들이 조금씩 흔들린다. 완성도가 떨어져 보이는 요인이 된다.

오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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