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몸은 파김치가 되고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복잡할 때 그냥 다 내려놓고 일상을 떠나 아무 생각 없이 단 하루, 아니 단 몇 시간만이라도 쉬고 싶은 그런 때.
하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다. 유명 관광지는 사람에 치이고 장사 속에 들볶여 오히려 스트레스가 더 쌓인다. 차와 사람으로 가득한 휴일의 관광지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싫다. 사람들에게 벗어나 호젓한 곳을 가기에는 교통편이 마땅치 않다. 길이 조금만 험해도 세단이나 무늬만 SUV인 두 바퀴 굴림차들은 쩔쩔맨다.
험한 길을 건너 자연의 품 안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는 정통 SUV들은 흔치 않고 시장에서 큰 인기를 누리지도 못한다. 시간이 갈수록 도시형 SUV로 세련된 옷을 갈아입는 대신 자연에서는 점점 멀어지고 만다.
오프로드를 제대로 달릴 수 있는 정통 SUV의 존재는 이제 틈새시장을 외롭게 지키는 ‘이방인’의 처지가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형으로의 ‘전향’을 거부한 채 스스로의 존재이유를 지키는 차들이 있음은 다행이다.
랭글러가 그렇다. 랭글러는 그야말로 정통 오프로더의 대표주자다. SUV라는 이름이 생기기 이전에는 ‘지프형자동차’였다. 그 지프의 정통성은 랭글러를 통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크라이슬러의 지프 브랜드가 2011년형 랭글러를 출시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랭글러 루비콘이다.
70년 전통을 자랑하는 짚 랭글러다. 역사는 1차 대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차 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짚’을 가진 미군의 발 빠른 기동력이었다.군용 짚을 민간용으로 다시 만든 게 CJ 이고 시간이 흘러랭글러 루비콘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그 차 랭글러 루비콘을 2011년에 다시 만났다. 시승차는 2도어 쇼트보디 모델이다.
박스형의 터프한 스타일은 짚의 전매특허다. 7개의 곧추선 그릴에 원형 헤드램프는 그 자체가 랭글러의 아이콘이다. 랭글러는 군용에 뿌리를 둔 차다. 군용차를 민간인용으로 만든 게 오리지널 짚이다. 그 짚이 전통성을 유지한 채로 지금까지 변해온 게 짚 랭글러다. 고리로 고정하는 보닛, 탈착이 가능한 지붕과 도어 등이 그 흔적. 이런 요소들은 군대놀이를 좋아하는 마초들이 이 차에 꽂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화려한 컬러도, 혹은 무채색 계열의 짙은 컬러도 이 차에는 어울린다. 노랑, 빨강 등 강렬한 컬러도 자연스럽게 소화한다. 검정과 회색 계열은 물론 깔끔한 흰색 역시 랭글러에는 무리가 없다. 강한 카리스마는 어떤 컬러를 입혀도 드러난다.
인테리어는 검소하다. 호화롭지도 고급스럽지도 않다. 그런 단어들은 지프에 어울리지 않는다. 실속을 추구하는 랭글러 답다. 가죽과 나무, 호화로운 광택, 은은한 조명은 럭셔리 세단의 몫일 뿐 숙명적으로 오프로드를 달려야하는 랭글러에는 불필요한 요소들이다.
대시보드의 재질이 조금 더 좋아진 정도가 그나마 랭글러에 허용된 사치다. 뒷창문은 더 넓어졌고 시야도 따라서 넓어졌다. 뒷좌석은 좁지만 그런대로 앉아 있을만하다. 프리덤 탑을 벗기면 차의 둘레를 커버하는 튼튼한 프레임 사이로 시원한 하늘이 드러난다. 오픈 드라이빙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컨버터블인 셈.
시동을 걸고 공회전 상태에서 800rpm을 보인다. 시속 100km에서는 2,200rpm으로 일반적인 세단보다 엔진 회전수가 조금 높다. 2011년형으로 바뀌면서 루비콘은 힘이 더 세졌다. 신형 2.8리터 디젤엔진을 얹어서 최고출력이 200마력이 됐다. 기존 랭글러는 177마력이었다. 최대토크도 46.9kg·m로 15% 높아졌다. 최대토크는 1,600rpm부터 2,600rpm 사이에서 고르게 나온다. 엔진회전수가 낮아도 충분한 토크를 낼 수 있다. 실용적이다.
유로 5 배출가스 기준도 만족시킨다. 친환경적이라는 말이다. 연비는 10.7km/l다. 덩치가 조금 크고 무거운 4도어 모델도 10.4km/l다. 사륜구동차는 같은 조건의 세단이나 두바퀴굴림차에 비해 연비가 좋지 않다. 사륜구동장치가 더해져 차가 무거워지는데다 엔진에서 네 바퀴로 동력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사라지는 힘도 있어서다. 그런 악조건에 2.8 리터 엔진을 가지고도 10km/L를 넘는 연비를 보이는 것은 칭찬할만하다.
핸들은 3.4 회전한다. 노면 상태가 온로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친 오프로드를 공략하기 위해선 이 정도 조향비가 어울린다. 약간의 유격도 필요한 부분. 노면에서 전해지는 주행저항과 진동 등을 일차적으로 걸러내기 위해서다.
가속페달이 일반 세단보다 더 깊게 밟히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오프로드에서 가속페달에 차가 민감하게 반응하면 오히려 좋지 않다. 여유를 가지고 쇼크를 흡수하며 자연스럽게 차를 다루기 위해선 가속페달도 여유가 있어야 한다.
랭글러 2011년형에는 스웨이바 기능이 있다. 앞쪽 서스펜션의 스트로크 길이를 늘려주는 기능이다. 시속 29km까지만 작동한다. 오프로드용 기능이다. 험로를 달릴 때 차의 흔들림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충격을 흡수해야 하는 서스펜션의 길이를 길게 해주는 것.
시속 100km를 넘기면서 바람소리는 커진다. 고속에서의 바람소리는 피할 수 없다. 수직으로 치솟는 박스형 스타일 때문에 공기저항이 클 수밖에 없어서다. 속도를 120km/h가지 올리면 바람소리는 물론 엔진소리도 엄청 커진다. 달리는데 문제는 없지만 부담스럽다.
전자식 5단 자동변속기가 올라갔다. 개인적으로는 수동변속기가 훨씬 더 랭글러다운 맛을 전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서 대세인 자동변속기를 거부하긴 현실적으로 어렵다. 수동 변속이 가능한 오토스틱이다.
변속레버 옆에 자리한 부변속기 레버가 향수를 자극한다. 반갑다. 구동방식을 운전자가 직접 레버를 조작해 바꾸는 방식이다. 많은 차들이 버튼으로 조작하거나 그마저도 생략해 전자동 사륜구동방식을 채택하고 있지만 랭글러는 끄덕도 하지 않는다. 파트타임 사륜구동방식이다. 평소에는 두 바퀴로 움직이고 필요할 때 부변속기를 이용해 사륜모드를 택한다. 사륜모드는 다시 하이, 로 모드 두 개로 나뉜다. 눈길, 빗길 등을 평상 속도로 움직일 때 하이 모드를 택하고 거친 험로를 해쳐나갈 때에는 로 모드가 제격이다. 로 모드에서는 다시 액슬록을 작동할 수 있다. 리어액슬록과 프런트 액슬록을 택할 수 있다. 프런트 액슬록은 앞뒤의 구동력을 리어액슬록은 뒷바퀴의 좌우 구동력을 직결시켜준다. 진흙길, 좌우측 회전차가 심하게 발생하는 길에서 매우 유용한 장치들이다.
바로 이런 기능들이 랭글러를 정통 오프로더, 오프로드의 왕자로 만들어 준다. 액슬록은 시속 16km 미만에서만 작동한다.
유감스럽게도 서울 근교에서는 이 차의 오프로드 능력을 제대로 경험할만한 길을 찾기 힘들다. 비교적 간단한 오프로드에 랭글러를 올렸다. 고인 물을 머금은 진흙길이어서 바닥이 미끌거려 무늬만 SUV인 차들에겐 쉽지 않은 길이지만 랭글러에게는 간단히 공략할 수 있는 길이다.
단단히 노면을 움켜쥐는 느낌이 핸들로, 가속페달로 전해온다. 미끌거릴듯 하면서도 차는 야무지게 오프로드를 공략해 나간다. 노면의 경사에 따라 흔들흔들 거리며 앞으로 나가는 맛이 재미있다. 이 맛에 중독되면 세단이 지루해진다. 많은 지프 마니아들이 바로 그런 맛에 중독된 이들이라고 보면 된다. 흔들거리며 나가다 장애물이 나오면 힘겹게 이겨내고 장애물에 빠진 다른 차를 견인해내고 밀고 당기며 이동하는 오프로드 주행의 묘미는 그 다음 단계다.
랭글러의 진가는 오프로드에서 빛을 발한다. 에어로다이내믹을 비웃는 정통 박스형 스타일 안에 눈에 드러나는 장치들은 많지 않지만 구동계통에는 다른 차에 없는 지프의 오프로드 기술이 잘 숨겨져 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쌓아온 노하우가 녹아있는 지프만의 기술이다.
세련되지 않은 차다. 그게 이 차의 매력이다. 시대의 흐름에 상관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랭글러다. 이 차를 좋아하는 이들이 다수는 아니지만 강한 충성심으로 이 차를 사랑하는 이유다. 에어로다이내믹이 휩쓸고, 오프로드는 아예 안중에도 없는 도심형 SUV들이 넘쳐나는 시대여서 오히려 랭글러의 존재 이유가 더욱 뚜렷해지는 셈이다.
세단은 도저히 갈 수 없는 곳, 강원도 어디쯤에서 지친 몸을 쉬고 싶다. 그 곳으로 랭글러와 함께 떠나고 싶다.판매가격은 2도어 4,690만원, 4도어가 4,990만원.
오종훈의 단도직입
왼발 공간이 좁다. 핸들 아래 가속페달과 브레이크 페달이 있는 공간. 왼쪽 발을 위한 공간이 여유롭지 않다. 주행하는 동안 늘 왼발이 제자리를 못 잡아 어중간했다. 부변속기를 조작하는 조건도 일반인에겐 까다롭다. 로 모드로 할 때에는 기어를 중립에 넣어야 하고 프런트 리어 액슬을 록킹할 때 16km/h 미만의 속도를 지켜야 하는 것도 그렇다.
시승 / 오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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