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처럼 차도 나이를 먹는다. 태어나서 죽기도하거니와 스스로 생식기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세대를 이어가기도 한다. 5세대 그랜저를 만나면서 ‘세월’을 느꼈다.
‘5세대’라는 단어가 주는 세월의 느낌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86년에 처음 나온 1세대 그랜저, 흔히 말하는 ‘각그랜저’는 미쓰비시 데보니어의 한국판이었다. 미쓰비시에 사정해서 기술을 들여다 만든 차다. 그랬던 그랜저가 이제는 독자 기술로 무장해 세계의 내로라하는 대형 세단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는 존재로 거듭 났다.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25년전 스승이던 미쓰비시는 이제 경쟁 상대가 아니다.
세월의 흐름은 이처럼 각자의 위치를 바꿔 놓았다. 하나는 거인으로 우뚝 섰고, 또 다른 하나는 화려한 옛날을 그리워하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했다. 어쨌든 그랜저는 남의 기술 들여다 만들기 시작해 당당히 독자 기술로 세계 무대로 진출한 ‘기술 독립’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그랜저를 되뇌일수록 흐믓한 미소가 흐르는 건 개인적 인연 탓이다. 20년전 기자는 그랜저를 타고 장가갔다. 각그랜저였다. 에어백이 있었고 앞은 물론 뒷좌석도 전동식 시트였고 차고를 조절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첨단 기능을 갖춘 차였다. 게다자 자동변속기여서 아무나 운전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 그때는 자동변속기가 지금의 수동변속기 만큼이나 귀한 시절이었다. 그땐 그랬다.
변함이 없는 사실은 그랜저엔 앞선 기능이 탑재된다는 사실이다. 옛날엔 옛날대로, 지금엔 또 지금대로 첨단기술의 세례를 받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드밴스드 스마트 쿠르즈 시스템을 비롯해 9개의 에어백, 전자식 파킹 브레이크, 오토홀드, 주차보조장치, 등등 그동안 고급 수입차에서 만나보던 고급 사양들을 이제 그랜저에서도 만나게 됐다. 당초 장착될 것으로 기대됐던 차선이탈 방지장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생략됐다.
어느 차나 그렇듯 그랜저 역시 헤드램프가 강한 인상을 준다. 특히 램프 위로 눈썹처럼 자리한 LED 램프는 짙은 눈화장 처럼 인상적이다. 어둠 속에서 헤드램프를 켜고 달리는 모습을 보면 부릅뜬 눈을 닮았다.
대형차답게 웅장한 디자인이다. ‘그랜드 글라이드’. 웅장한 활공을 모티브로 차의 곳곳에 독수리의 날개, 눈매를 응용한 디자인 요소들이 적용됐다. 웅장하고 화려하지만 때로 현란하다는 느낌도 준다. 선이 많다. 디자이너의 넘치는 의욕을 느끼게 하지만 아름다움과는 별개다. 있는 듯 없는 듯 부드럽게 절제된 디자인이 특히 고급 세단에는 어울린다. 물론 제네시스, 에쿠스로 이어지는 대형차 라인업상 제일 아래에 있는 모델이라 이해는 가지만 조금 더 절제하면 조금 더 멋있겠다.
그랜저는 4910mm로 이전 모델인 TG와 동일하고 높이는 20mm 낮아졌고, 너비는 10mm 넓어졌다. 휠베이스는 65mm나 늘었다. 휠베이스가 늘면서 실내 공간이 넓어졌고 거주성도 향상됐다. 뒷좌석은 머리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천장 부분을 파냈다. 덕분에 여유있는 헤드 클리어런스를 유지할 수 있다. 앞바퀴 굴림이라 뒷좌석엔 센터터널이 없다. 바닥이 거의 평평해 공간활용성이 좋다. 센터터널을 이전 모델보다 무려 77mm나 낮췄다는 설명이다.
차를 처음 타서 첫 발을 뗄 때의 느낌은 매주 중요하다. 첫인상이 결정되는 순간이어서다. 그랜저 하면 떠오르는 첫 인상. 기자의 첫인상은 숨죽인 엔진소리와 비단길을 미끄러지는 느낌으로 정리해 본다. 그랜드 글라이드, 활공하는 느낌일수도 있겠다. 여유있게 날개짓하며 쨍한 하늘을 배경으로 적막 속에 활공하는 느낌. 공회전 상태에서 600rpm에 불과한 엔진은 아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놀라운 정숙성이다.
엔진 소리는 잘 통제됐다. 직분사 방식인 GDI 엔진은 그 특성상 엔진 폭발음이 클 수밖에 없다. 힘이 센 대신 시끄러운 것. 그랜저는 그런 거친 엔진을 순둥이로 만들었다. 조용하고 얌전했다. 고속주행을 할 때에도 마치 엔진을 푹신한 이불로 꽉 덮어놓은 것처럼 엔진 소리는 조용하고 아득했다. GDI의 힘은 취하고 소리는 버린 것이다.
가속에선 여유가 느껴졌다. 부드럽고 힘 있게 치고 나갔다. 강한 힘을 가진 부드러움은 가진 자의 여유다. 언제든지 필요할 때 치고나갈 수 있는만큼 평상시에 아득바득 힘을 쓸 이유가 없다. 여유있고 부드럽게 달리다가 필요하면 가속페달을 깊숙하게 밟아주면 된다. 3.0 리터의 GDI 엔진에터 터지는 270마력의 힘은 멋있게 차를 끌고 나간다.
가끔 물렁한 느낌이 들 정도로 그랜저는 승차감 위주의 세팅을 했다. 대형세단에서 승차감은 포기할 수 없는 덕목. 그렇다고 코너에서 휘청일 정도는 아니다. 서스펜션은 다른 딱딱한 차에 익숙한 이들에겐 소프트하겠지만 승차감을 만끽하기에 딱 좋은 수준이다.
놀라운 것은 어드밴스드 스마트 쿠르즈컨트롤이다. ‘스마트’ 앞에 ‘어드밴스드’ 가 더 붙은 것은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은 시속 40km 미만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랜저는 이 한계를 깼다. 즉 완전 정지까지 가능한 것이다. 앞차가 정지하면 스스로 서고, 3초 내에 앞차가 출발하면 그랜저도 알아서 스스로 출발했다. 그랜저의 크루즈 컨트롤은 0-180km/h 구간에서 작동한다. 차가 스스로 서는 색다른 경험이 재미있었다.
6단 자동변속기는 부드럽게 작동했다. 270마력의 힘을 잘 보조하면서 변속 충격없이 속도를 조절했다. 손에 쏙 들어오는 변속레버의 촉감도 좋고 레버를 움직이며 조작하는 느낌도 우수했다. 수동 변속기능도 있어 손맛을 즐길 수도 있다.
시속 100km에서 D와 6단에서 1800rpm을 마크한다. 일반적인 수준인 2,000rpm보다 낮은 수준. 100km/h를 유지하면서 변속을 이어갔다. 5단에서 2400, 4단 3200, 3단 4100rpm을 각각 보였다. 여유 있고 낮은 수준의 rpm이다. 최고출력은 6400rpm에서 터진다. 고출력 엔진이다. 중저속에서 충분한 힘을 내는 만큼 최고출력은 6000rpm을 한참 넘겨 만들어내는 것. 31.6kgm인 최대토크도 비교적 고회전 영역인 5300rpm에서 나온다.
핸들은 3회전한다. 승차감을 중시하는 대형세단에 걸맞는 조향비다. 승차감이 먼저인 고급세단인만큼 날카로운 핸들링은 어울리지 않는다. 예민한 핸들링은 운전하는 즐거움을 줄진 모르지만 편안한 승차감과는 거리가 있다. 핸들을 흔들면 차는 조금 둔하게 리액션한다.
엔진의 위치는 애매하다. 앞 차죽을 기준으로 보면 확실하게 앞쪽으로 쏠려있다. 운전석에서 보면 중앙에서 오른편으로 쏠려있다. 앞바퀴 굴림방식인만큼 엔진이 정중앙에 위치하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너무 앞쪽으로 배치됐다. 실내 공간을 욕심내서 앞으로 밀다보니 엔진이 더 앞으로 밀려난 셈이다. 또한 엔진은 높게 배치돼서 미국에서의 보행자 안전 기준을 어떻게 맞출지 의문이다.
시야를 돌려보니 사이드미러 형상이 유머러스하다. 서유기에 등장하는 저팔계의 귀를 닮았다. 시야를 확보하는데에는 아무 문제 없다.
선루프는 그랜저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다. 큰 대문이 활짝 열리듯 지붕을 넓은 유리가 덮고 있어 시원하다. 지붕을 열지 않고 롤 브라인드만 열어도 시원한 하늘을 만날 수 있어 좋다. 깊게 가속페달을 밟아 가속을 이어가면 5,400rpm에서 시프트업이 일어난다. 시속 60, 100, 150, 200km에서 각각 변속이 됐다. 변속 쇼크는 느껴지지 않았다. 계기판을 보고 있지 않으면 언제 변속이 일어나는지 알아채기 힘들다.
현대차는 이제 경지에 올랐다. 시승을 하는 동안 문득 스친 생각이다. 그랜저를 앞세워 수입차와 맞짱을 떠도 이젠 밀리지 않겠다. 제원표 상으로만 봐도 엔진 출력, 편의장치, 안전장치 등의 면에서 한 치도 밀리지 않는다. 그랜저가 경쟁 상대로 지목하는 렉서스 ES 350과 견주면 그랜저가 크고 출력은 조금 떨어지지만 연비는 앞선다. 조용함도 결코 뒤지지 않을 수준. 화려한 옵션과 편의장치들은 가격대비 경쟁력을 훨씬 높여준다. 수입차와의 한 판 승부가 볼만하겠다.
오종훈의 단도직입정지 상태에서 가속페달을 깊게 밟아 출발하면 휠스핀이 살짝 일어난다. 헛바퀴를 돌며 주춤거리는 느낌. 결국 힘의 낭비다. VDC가 적극 개입해 구동력을 관리해야 한다. 그래야 연료도 아낄 수 있다. 센터 페시아 디자인은 대형 세단의 그것이라고 보기 힘들 만큼 의욕적이고 상상력이 넘친다. 대형차 디자인으로서는 의욕과잉이다. 너무 튄다. 센터페시아와 도어 패널에 사선으로 내리 꽂히는 선들이 어지럽다.
AUTO LAB
시승코스는 아기자기하게 재미있었지만 속도를 충분히 내기에 교통량이 많았다. 한적한 도로에서 제로백과 제동테스트를 몇 차례 시도할 수 있었다. 제로백 기록은 7.42초. 정지후 출발해서 110.11m를 통과하는 시점에서 시속 100km를 돌파했다. 제법 빠른 기록이다.
제동성능도 만족스러웠다. 시속 100km에서 강하게 제동을 한 결과 3.09초만에 43.86m를 더 가서 멈춰섰다. 제동하는 순간의 차체 자세도 안정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