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이슬러가 모처럼 활기를 띄고 있다. 3년 여 만에 신차를 내놓아서다. 미국 자동차산업의 위기과정에서 수모를 겪은 크라이슬러가 피아트를 새 주인으로 맞아 재도약을 다짐하면서 한국에서도 모처럼만에 활기를 보이고 있다. 새로 내놓은 신차는 그랜드 체로키. 지프 브랜드의 플래그십 모델이다.

지프는 누가 뭐래도 남성적인 브랜드다. 전쟁 통에 태어났고, 거친 들에서 커온 브랜드다. 지프는 또한 아메리칸 SUV의 상징이다. 얼마 전까지는 ‘지프’가 SUV를 뜻하는 대명사였다. 자동차관리법에도 ‘지프형자동차’라는 분류가 있었다. 지금의 SUV에 해당하는 분류다.

미국에 지프, 영국엔 랜드로버. 두 브랜드는 SUV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일궈온 탁월한 브랜드다. SUV라는 동네의 원주민쯤으로 봐도 무방하다. 온갖 풍상을 겪고 오늘에 이른 지프가 완전 풀체인지한 그랜드 체로키를 한국에 내놓은 것이다.

피는 속일 수 없다고 했다. 뉘 집 자식인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한 눈에 알 수 있는 외모. 그랜드 체로키가 그랬다. 일곱 개의 직사각형으로 구성된 세븐 슬롯 그릴이 그런 역할을 한다. 그릴만 보면 지프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것. 눈이 밝은 이들은 사다리꼴의 휠하우스에서 이 집안의 혈통을 찾아내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지프는 사다리꼴 휠 하우스를 고집해왔다. 헤드램프를 잘 살펴보면 지프의 형상이 그려진 것을 찾을 수 있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위해 숨겨놓은 것처럼, 하지만 누가 봐도 아주 분명하게 지프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개발자의 유머이자 위트다.

보디의 라인은 과장이 없다. 다이내믹을 강조하며 앞으로 쏠리지도, 강인함을 돋보이려고 뒤로 누이지도 않았다. 담담하게 필요한 만큼의 선을 썼다. 과장이 없는 표정에서 오히려 연륜이 쌓인 녹록치 않은 내공을 느낀다.

선루프는 1열과 2열을 다 커버할 정도로 넓다. 놀라운 것은 그 넓은 공간을 가로 지지대 없이 통으로 선루프를 배치한 것. 차체의 강성을 유지하면서 대형 선루프를 지지대 없이 설치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차는 크고 넓다. 특히 1943mm의 너비는 경쟁모델들을 단연 앞선다. 넓은 공간을 만들기에는 큰 차가 단연 유리하다. 물론 폭이 넓은 점은 비좁은 공간을 나누어 살아야 하는 대도시에서 때로 불편할 때도 있다.

2열 공간은 매우 넓다. 바닥도 평평하고 시트도 넓은 데다가 앞 뒤 공간도 넉넉해 한결 여유로운 공간을 확보했다. 장거리 여행을 할 때 특히 좋겠다.

한 가운데에 Jeep 마크가 새겨진 3스포크 스티어링 휠은 클래식한 느낌을 준다. 버튼식 시동키를 적용했다. 수직과 직선이 주를 이뤘던 이전 세대의 그랜드체로키에 비해 신형은 부드럽고 완만한 면처리로 변했다. 조금 더 원숙해진 맛이다. 세월의 흐름이 녹아 있는…….

버튼을 눌렀다. 시동이 걸렸다. 멈춰있던 엔진이 숨을 쉬고, 정물이던 차가 움직인다. 핸들을 쥔 드라이버의 심장도 벌렁거린다. 차도 사람도 살아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다.

핸들은 3.7 회전했다. 일반적으로 3회전을 넘기는 경우를 찾기 힘들다. 오프로드 주행을 염두에 둔 그랜드체로키이기 때문에 이처럼 넉넉한 조향비를 갖췄다. 약간의 유격도 느껴진다. 스포츠카라면 이 같은 스티어링 특성은 마이너스 요소다. 조향비도 좁고 유격이 없는 타이트한 스티어링이 스포츠카에는 제격이다. 하지만 오프로드 주행까지 염두에 둬야 하는 그랜드체로키라면 얘기가 다르다. 오프로드를 달릴 때 지속적으로 전해오는 충격을 적절하게 걸러주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유격도 필요하고 또한 조향비도 넉넉해야 한다. 그렇다고 물렁한 핸들이 아니다. 온로드를 주행할 때에는 유격을 느끼기 힘들다. 핸들에 대한 차체의 반응도 즉각적이다. 온오프로드를 두루 섭렵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차의 특성이다.

그랜드 체로키는프레임 방식을 고집했다.너도 나도 모노코크 보디 스타일을 적용하고 있지만 그랜드 체로키는 여전히 프레임을 고수하고 있다. 정통 SUV라면, 게다가 오프로드 주행을 포기할 수 없는 차라면 프레임이 제격이다. 여기에 더해 보디의 비틀림 강성을 146% 높였다는 크라이슬러측 설명이다.

온로드에서 차의 반응은 부드럽고 힘이 넘쳤다. 시속 100km에서 rpm은 1600 전후로 매우 안정적이다. 엔진을 세게 돌리지 않아도 필요한 힘을 쓸 수 있게 세팅된 것이다. 3.6 리터 DOHC V6 엔진은 286 마력의 힘을 낸다. 재미있는 것은 크라이슬러가 다임러크라이슬러 시절 벤츠와 함께 개발한 엔진이라는 사실이다. 벤츠와 크라이슬러가 함께 만든 엔진이 이제 피아트 슬하에 흡수된 크라이슬러가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향후 크라이슬러의 주력 엔진으로 자리잡을 새로운 병기다.

하나 더 있다. 서스펜션이다. 그랜드체로키의 서스펜션은 벤츠 ML 시리즈와 공유한다. 굳이 벤츠와 서스펜션 등을 공유한다는 것을 먼저 자랑할 일은 아니다. 세단이라면 모를까 SUV라면 그랜드 체로키가 벤츠 ML보다 못할 게 없다. 어쨌든 앞뒤의 서스펜션은 차체와 분리 장착되는 방식이어서 소음과 진동을 차단하는 효과가 크다.

그랜드 체로키의 서스펜션은 차체의 최저 지상고를 최저 165mm부터 271mm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 콰트라 리프트 에어서스펜션의 힘이다. 온로드를 빠르게 달릴 때에는 낮게, 장애물이 많은 거친 오프로드를 움직일 때에는 차를 높게 들어올릴 수 있는 것. 모두 5가지 단계로 차의 높이를 조정할 수 있다.

영종도의 가벼운 오프로드를 출렁이며 움직이는데 차체의 반응은 단단했다. 마냥 출렁이는 게 아니라 적절하게 제어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서스펜션이 차체를 잘 받쳐주고 있을 뿐 아니라 사륜구동 시스템이 최대의 구동력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륜구동 모드는 모두 5개 버전이 있다. 온로드 지향의 SUV에서는 자취를 감춘 로 기어도 있다. 그뿐인가. 최고급형인 오버랜드 모델은 20인치 대형 타이어를 갖췄다. 적어도 오프로드에서는 경쟁 SUV를 확실하게 압도할 수 있는 능력과 시스템을 갖췄음을 그랜드 체로키는 말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오프로드 드라이빙을 좋아한다. 자꾸 오프로드 중심으로 이 차를 얘기하는 이유다. 그랜드 체로키는 온로드에서도 빠지지 않는 성능을 보인다. 적절한 힘을 안정적으로 꾸준히 뿜어낸다.

풀타임 사륜구동에 힘입은 주행 안정성도 돋보인다. 쭉 뻗은 직선로에서 가속을 이어갈 때 차체의 안정감은 인상적이다. 높은 차체에도 불구하고 코너가 두렵지 않은 이유도 바로 사륜구동을 믿기 때문이다. 굳이 오프로드에 올려놓지 않아도 그랜드 체로키의 진가는 빛을 발한다.

그랜드 체로키는 가솔린 모델에 고급형과 최고급형을 운용한다. 최고급형은 오버랜드 모델로 에어서스펜션과 20인치 타이어, 우드 스티어링 휠, 통풍 시트 등을 갖췄다. 고급형은 5,590만원, 오버랜드 모델은 6,890만원이다. 편의장치 수준과 성능으로 볼 때 프리미엄 SUV들과도 어깨를 견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크라이슬러는 향후에 그랜드체로키 디젤 모델도 내놓을 계획이다. 디젤 모델에는 견인장치와 콰트라드라이브 시스템을 장착해 조금 더 오프로드를 지향하는 강한 모델로 선보인다는 전략이다. 내년 2분기쯤 6000만 원대에 내놓을 에정이라고 크라이슬러는 밝혔다.

오종훈의 단도직입

자동 5단 변속기다. 이 때문에 신형 3.6 엔진의 빛이 바랜다. 이왕에 신형 엔진을 장착했는데 궁합을 맞출 변속기는 6단은 돼야 시대에 맞는 게 아닌가한다. 풀타임 사륜구동시스템을 얹고 다양한 편의장치들을 얹느라 그랬겠지만 연비가 7.8km/L로 시장에서 경쟁해야하는 수입 SUV들에 비해 그리 우수하지 않는 이유중 하나도 바로 5단 AT가 아닌가 싶다.

오종훈

yes@autodia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