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가문의 역사를 정리해 놓은 족보는 양반임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다. 심지어 개도 족보를 따진다. 족보가 의미를 갖는 건 근본, 역사를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해서 족보가 없으면 제대로 대접받기 힘든 게 세상이다. 옛날 얘기라고 치부할 일은 아니다. 요즘 세상에도 족보의 힘은 엄연히 존재한다.
시작부터 족보 타령인 것은 370Z를 말하기 위해서다. 자동차에서 족보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족보 있는 차는 대접 받지만 족보 없는 차는 노력에 비해 저평가될 수밖에 없다. 억울해할 일은 아니다. 시간이 흘러 그럴듯한 족보를 갖게되면 그들도 합당한 평가를 받게 될 테니….
Z는 일본 스포츠카에서 무시못한 족보를 가졌다. 닛산의 스포츠카로 일본 스포츠카의 대표주자인 이 차의 역사는 6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69년 출시된 페어레이디Z가 이 차의 뿌리다. 페어레이디 Z는 이후 일본형 스포츠카라는 명성을 얻으며 지금까지 170만대가 팔렸다. 오랜 세월 다듬어지고 개선된 스포츠 모델인데다 일본 스포츠카의 대표 모델이라 할 수 있는 이 차를 시승했다.
370Z다. ‘포르쉐는 벅찬 상대를 만났다’는 게 이 차의 광고 카피. 포르쉐를 경쟁상대로 상정해 놓은 것이다. 당돌함에 미소로 답했다. 박수쳐야 할 일이다. 상대가 인정을 하던 안하던높은 수준의 라이벌을 상정하는 것은바람직한 일이다. 끊임없이 자극을 받으며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강렬한 디자인은 매우 개성이 강하다. 보편적이지 않은 모습. 남들과 같아 보이는 게 가장 기분 나쁜 일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날카로운 헤드램프가 더 이 차의 인상을 강하게 만든다. 옆에서 보면 같은 닛산의 최고급 스포츠카 GT-R의 모습이 있기도 하고 더러는 포르쉐의 라인이 보이기도 한다. 앞이 길고 뒤가 짧은 롱노즈 숏 테일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스포츠카나 스포츠 세단은 옆에서 보면 앞으로 쏠리는 웻지 스타일을 추구한다. 정지상태에서도 동적인 느낌이 묻어나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 차는 오히려 뒤쪽이 더 무거운 느낌이다. 그렇다고 다이내믹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차하면 튀어 오를 것 같은 개구리의 모습 닮았다.앞으로 달려 나갈 것 같은 착시효과가 아니어도 충분히 다이내믹함을 표현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뒤에서 보면 바깥으로 잔뜩 부푼 휠하우스로 눈길이 간다. 빵빵한 엉덩이다. 포르쉐의 그것과는 또 다른, 좀 더 육감적이고 원초적인 모습이다. 닛산은 Z-ness, 즉 Z 다움을 강조한다. 디자인 변화가 결코 Z다운 모습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인테리어는 양극을 달린다. 눈을 즐겁지만 몸은 불편하다. 우선 출입이 어렵다. 차가 낮아서다. 배가 나온 뚱뚱한 사람은 몸을 구부리고 낮은 시트에 무사히 자리잡기까지, 혹은 낮은 시트에서 벗어나 온전히 차 밖으로 나오기까지 편치 않는 자세를 거쳐야 한다. 그래도 좋다. 스포츠카가 주는 불편함은 그 차가 잘달리고 짜릿한 즐거움을 주기만 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 불편해도 좋은 차, 바로 스포츠카다.
화려한 계기류들은 눈을 즐겁게 한다. 센터 페시아 위로 자리한 트리플 미터. 냉각수 온도계, 시계, 배터리 전압계 등의 게이지 들이 나란히 자리해 스포츠카 다운 분위기를 만든다. 스포츠카지만 좋은 가죽과 고급 소재를 사용해 실내를 충분히 고급스럽게 꾸몄다. 오로지 달리기만 하는 경주용차가 아니라 도로 위를 달리며 일상 생활을 영위해야 하는 에브리데이 스포츠카를 지향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인테리어다. 센터 페시아 위쪽으로 수납공간이 배치돼 어색하지만 가죽 커버로 닫아 놓으면 어색함은 많이 완화된다.
도어 커시티에, 스티어링 휠 가운데, 좌우 펜더에 이니셜 Z가 자리했다. 사무라이의 칼로 새겨놓은 듯 날카로운 선이 살아있다.
7단 자동변속기에 FR 구동방식이다. 수동변속기라야 오리지널 스포츠카의 성격을 그대로 느낄 수 있지만 아쉽게도 국내 시판차엔 자동변속기만 적용된다. 자동변속기가 재미는 덜한 대신 수고로움을 더는 편안함이 있으니 그 또한 나쁘지 않다.
핸들은 2.7회전 한다. 3회전에 한참 못미친다. 조향비가 이처럼 좁은 것은 스포츠카에 걸맞는 세팅이다. 예민하고 빠른 반응을 기대할 수 있다. 핸들 아래로는 패들시프트가 있다. 핸들에 붙어 있는 게 아니라 핸들 아래에 따로 고정돼 있다. 핸들에 붙어 있으면 코너에서 핸들을 돌리며 패들시프트를 조작할 때 헛갈릴 수 있다. 하지만 핸들과 분리돼 고정된 패드시프트 레버는 항상 위치가 고정돼 있어 헛갈릴 일이 없다.
시동을 켜면 우렁찬 엔진 소리가 올라온다. 조용함을 기대해선 안된다. 힘찬 소리에서 이 차의 고성능을 느낄 수 있어야 370Z와 궁합을 맞출 수 있다.
수동변속 모든에 넣고 출발. 1단이 60km/h까지 커버한다. 빠르다. 소리도 크다. rpm 게이지가 춤을 추며 가파르게 속도를 끌어 올린다. 레드존은 7500rpm부터다. 2단에서 95km를 기록한 뒤 3단 145km, 4단 220km까지 각각 마크한다.
계기판 중앙에 자리한 것은 속도계가 아니라 타코미터, 즉 rpm 게이지다. 속도계보다 rpm을 보면서 운전하라는 의미다.
행운의 숫자 333은 이 차의 최고출력이다. 쇼트 스트로크 엔진이 바쁘게 치고 올라가는 엔진은 시속 200km를 무시로 지나친다. 속도감은 제법 느껴진다. 시속 200km에서의 느낌이 럭셔리 세단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 이상 속도를 올리기는 어렵지 않으나 운전자의 담력이 요구된다. 차는 더 달리자하는 데 운전자가 허락하지 못한다. 달리면 가슴이 벌렁 거린다.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났을 때 어김없이 나타나는 고질병이다. 늘씬한 미녀와의 데이트를 즐기듯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비된다.잠자는 미녀를 입맞춤으로 깨우듯 엔진을 살짝 흔들어 깨운다.날카로운 첫 키스 만큼이나 짜릿하고아찔한 경험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달린다. 도로 끝, 한 점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달리고 머리 속은 백지처럼 하얗다. 차와 내가 한 몸이 되어 달리는 쾌감. 황홀하고도 아주 특별한 경험이다. 꿈인듯 아닌듯 한동안 정신없이 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다. 시승을 하는 것도, 운전을 하는 것도 아닌, 그냥 차와 내가 하나임을느끼는 시간이었다.가속페달이 바닥에 닿을 때 킥다운이 걸리는 느낌은 없다. 바닥에 닿을 때 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다. 잘 달리는 차에 시트는 매우 중요하다. 차와 드라이버의 일체감을 이루는데 필수적인 요소기 때문이다. 버킷 시트는 그런 면에서 매우 유용하다. 몸을 전체적으로 잘 받쳐줘 차의 움직임에 몸이 크게 흔들리지 않도록 돕는다.
정지상태에서의 무게 배분은 앞뒤가 53대 47. 가속시에는 일대일이 되도록 만들었다. 무게 배분이 안정적이면 그만큼 주행안정성이 좋아진다. 스포츠카는 잘 달리면 어지간한 불편함은 용서받는다. 하지만 절대 용서받지 못할 부분이 있다. 브레이크다. 브레이크가 약한 고성능은 사상누각이다. 370Z는 확실한 제동력을 보여준다. 어지간한 고속에서도 차의 균형을 적절히 유지하며 정확하게 제동한다. 게다가 엔진 브레이크는 다른 차들보다 훨씬 더 확실한 반응을 보인다. 시프트다운을 하는 순간, 확 치고 오르는 타코미터의 바늘과 귀청을 자극하는 엔진음을 함께 느끼며 시트벨트가 몸을 잡아주는 느낌은 운전하는 즐거움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가속의 즐거움 못지 않게 제동의 묘미를 이 차는 보여준다.
인피니티의 G37을 생각해 본다. 같은 족보를 가진 형제들이다. G37이 정교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이라면 370Z에게서는 조금 거친듯한 야성이 느껴진다. 비슷한 달리기 성능이지만 달리기로만 한다면 370Z가 한발짝 앞선 느낌이다.
시대를 관통하며 30년의 역사를 가진 Z의 존재는 그 자체로 많은 것을 말한다. 일개 스포츠카에 불과한 Z가 오랜 시간을 두고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메이커의 의지도 중요했지만 이를 사랑해준 소비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동차 50년 역사에 이제는 한국에도 제대로된 스포츠카 하나쯤 있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제로백 5초 전후로 끊고 컨버터블 버전도 갖춘, 조금 튄다 싶어도 미끈하게 잘 빠진, 혼자만의 확실한 DNA 하나쯤은 가진 그런 스포츠카가 이젠 한국에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370Z를 넘겨주고 오면서 그런 생각이 물밀듯이 든다.
오종훈의 單刀直入멋진 모습을 만들다보면 본의 아니게 불편한 부분이 생긴다. 뒷 시야가 그랬다. 룸미러에 비치는 후방 시야는 좁다. C 필러와 뒤창이 잔뜩 드러누워 있어서 이를 통해 보이는 뒷 시야가 그리 편치 않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뒤를 보면 B 필러가 시야를 가린다. 하지만 사이드 미러는 비교적 넉넉한 시야를 보장한다.
엣지 있는 도어는 위험해 보인다. 프레임이 없는 도어를 열면 도어와 유리에 예각이 드러난다. 사람이 부딪히면 심하게 다칠 수 있겠다. 보완책을 궁리해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