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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원표에 숨은 뜻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차의 이름을 대며 “그 차 어때?” 하는 질문이다. 장황하게 차의 특징, 제원, 가격을 설명해 주면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때론 나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하던 사람들이 결국에 묻는 말이 있다. “그래서 그 차 좋은거야 나쁜거야?” 답답한 노릇이다. 세상사 모든 일을, o x 좋고 나쁨으로 두부 자르듯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차가 좋은 차일까? 혹은 어떤 차가 나쁜 차일까? 연비가 우수하지만 너무 가벼워 충돌하면 흔적조차 찾기 힘든 차와 어지간한 충돌에서는 흠집조차 남지 않지만 너무 무거워 연비가 아주 나쁜 차중 어느 쪽이 좋은 차일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

각자의 처지에 딱 맞는 차가 좋은 차 아닐까? 빠듯한 살림이지만 차가 꼭 필요한 이들에게는 차 가격, 연료비, 세금 등이 싼 경제적인 차가 좋은 차 아닐까. 높은 지위에 있어 시간을 빠듯하게 쪼게 쓰는 이들에게는 차 안에서라도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승차감이 편한 차가 좋을 것이다.

혈기왕성하고 분명한 성격에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력도 있는 이들이라면 십중팔구 달리는 맛을 느낄 수 있는 스포츠카나 레저활동에 좋은 suv 등 뭔가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차를 좋아할 것이다.

각자의 처지에 따라 좋은 차가 따로 있다는 말이다. 무조건 이 차는 좋은 차다, 혹은 나쁜 차다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 차가 과연 어떤 성능과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답은 제원표에 있다. 자동차 카다로그 뒤편에 조그맣게 자리잡은 표 하나에 그 차의 특성이 대부분 담겨져 있다. 그 제원표를 제대로 읽는 방법은 이렇다.

제원표에 가장 먼저 표기되는 것은 차의 크기다. 전장, 전폭, 전고 등으로 쓰는 경우도 있지만 길이 너비 높이로 표기하는 게 맞다. 길이 너비 높이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다만 너비는 차의 양옆에 달려있는 사이드 미러는 제외한 폭을 말한다.

축거는 축간 거리의 줄임말이다. 앞차축과 뒤차축간 거리로 앞뒤 타이어의 중심간 거리와 같다. 영어로는 휠베이스다. 윤거 혹은 트레드는 좌우측 바퀴간 거리다. 트레드는 앞 뒤가 다를 수 있다. 즉 앞 타이어의 좌우측 거리와 뒷타이어의 좌우측 거리가 다를 수 있다.

트레드와 휠베이스가 길면 차가 안정된 자세로 움직일 수 있다. 차가 덜 흔들리고 편안해지는 것. 대신 회전반경이 길어져 차가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은 떨어진다. 움직이는 데 많은 공간이 필요해지는 것.

최저지상고는 지상에서 타이어, 휠, 브레이크 부분을 제외한 차의 가장 낮은 곳 까지의 거리다. 차축 가운데 둥그렇게 자리잡은 디퍼렌셜 기어박스의 아랫부분이 대게의 경우 가장 낮은 곳이 된다. 차 바닥을 한 번 살펴보면 둥그렇게 튀어나온 부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바로 그곳과 땅 바닥과의 거리가 최저 지상고다.

최저지상고가 높은 차는 장애물이 많은 험로를 잘 달릴 수 있다. 지상고가 낮으면 차 바닥이 장애물 등에 걸리는 등 험로에서 움직이기 힘들다. 롱다리가 장애물 경기에 유리한 것과 다르지 않다. 지상고가 낮은 승용차는 비포장길을 다니기 힘들지만 지프형차는 지상고가 높아 조금 험한 길도 쌩쌩 달릴 수 있다.

그렇다면 지상고가 높은 게 항상 좋은 건 아니다. 지상고가 높아서 손해를 보는 일도 있다. 차의 무게 중심이 높아져 승차감이 떨어지고 전복 위험도 상대적으로 높아진다.

공차중량은 차에 사람이나 짐을 싣지 않은 빈차의 무게다. 이때 연료와 각종 윤활유는 규정에 따라 가득 채우지만 스페어타이어, 공구 등은 제외한다.

차량총중량은 공차중량에 승차정원을 모두 태우고 여기에 최대 적재량을 더한 무게다. 탑승인원은 1명당 55kg을 적용한다.

최소회전반경은 핸들을 완전히 돌린 상태로 회전할 때 바깥쪽 타이어가 그리는 원의 반지름을 측정해 정한다. 정확하게 따진다면 범퍼 끝 궤적이 그리는 실제의 회전반경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차가 회전할 때 그리는 원의 반지름으로 이해하면 된다. 휠베이스가 길면 회전반경도 길어진다.

내경과 행정은 영어로는 보어와 스트로크다. 엔진 내부를 보면 실린더가 있고 그 안에 피스톤이 있다. 주사기를 예로 들면 주사기 통은 실린더, 주사기 안에서 주사액을 밀어내는 막대기가 피스톤에 해당한다.

보어는 실린더의 지름을 말한다. 스트로크는 피스톤이 실린더 내부에서 가장 높이 올라가는 지점(상사점)과 가장 아래로 내려오는 지점(하사점)간 거리가 스트로크다. 내경보다 행정이 길면 롱스트로크 엔진, 그 반대면 쇼트 스트로크 엔진이다.

롱스트로크 엔진은 압축비가 크고 엔진회전수가 낮은 영역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 대게 디젤 엔진이 여기에 해당한다. 쇼트 스트로크 엔진은 엔진회전수가 높은 영역에서 효과적이다. 압축비가 상대적으로 낮아 효율면에서는 떨어진다. 스포츠카에 적합한 엔진이라고 할 수 있다.

압축비는 실린더 안에서 피스톤이 공기를 압축하는 비율이다. 피스톤이 하사점에 있을 때의 실린더 면적과 상사점에 도달했을 때의 실린더 면적 비율이다. 많이 압축되면 폭발력도 세진다. 압축비가 높으면 출력이 세진다. 대신 가솔린 엔진에서는 압축비가 너무 높아지면 노킹이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휘발유 엔진 압축비는 11:1을 넘기지 않는다.

디젤엔진은 압축비가 훨씬 높다. 점화플러그가 없고 압축열에 의해 자연폭발시켜야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디젤 엔진의 압축비는 15~22:1 정도가 된다.

최고출력과 최대토크는 엔진의 힘을 표기하는 방식이다. 출력과 토크는 그 개념이 조금 다르다. 최고출력이 높을수록 차의 최고속도도 따라서 높아진다. 토크가 크면 등판능력, 견인력 등에서 유리하고 순간 가속력도 우수해진다.

엔진 힘을 타이어에 전달할 때 그 힘을 속도에 맞게 효과적으로 조절해 주는 게 변속기다. 변속기에서 중요한 게 변속비인데, 변속비가 3:1이면 엔진 구동축 톱니가 3회전해야 타이어와 연결된 출력축 톱니가 1회전한다는 것이다. 변속비가 크면 힘은 세지지만 속도를 높이는 데는 불리하다. 저단 기어일수록 변속비가 크고 고단 기어에서는 변속비가 작다.

연비는 연료 1리터로 달릴 수 있는 거리를 나타낸다. 10km/ℓ는 연료 1ℓ로 10km를 달릴 수 있다는 것. 연비는 자동차와 운전자, 도로상황, 운전습관 등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공식 연비와 실제 연비 사이에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자동차를 이해할 때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다른 하나를 잃는다는 것이다. 승차감을 얻으면 성능에서 손해를 감수해야하고, 험한 길을 잘 달리면 포장길에서의 승차감은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는 게 자동차의 생리입니다.

승차감이 최고 수준이라는 롤스로이스. 승차감은 편하지만 차의 운동성능은 그리 좋다고 할 수 없다. 성능이 압권이라는 페라리의 승차감은 정말로 꽝이다.

이처럼 하나를 얻고 다른 하나를 잃는 것은 일반 승용차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투스카니의 달리기 성능에 에쿠스의 승차감, 티코의 경제성을 두루 겸비한 차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좋은 차와 나쁜 차로 구분하기 보다는 나에게 맞는 차와 안맞는 차로 구분하는 게 더 합리적이다. 설사 나와 맞지 않는 차라고 해도 다른 누구에게는 더없이 좋은 차 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오종훈 기자 yes@autodiar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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